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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영상의 힘 1983년 6월 30일 KBS에서는 한국전쟁 휴전 30주년특집으로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산가족 150명을 대상으로 3시간 정도 방영할 예정으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방송이 시작되자 1,000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몰려들었고 방송은 정규시간을 넘어 연장에 연장을 거듭했다. 이산가족을 찾는 행렬이 예상을 뛰어넘어 장사진을 이루자 KBS는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한 채, 세계 방송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산가족찾기'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하게 된다. 이 방송은 78%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고 방송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이산가족 상봉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11월 14일까지 138일 동안 총 453시간 45분 방송됨으로써 단일 주제 생방송 기록을 남겼고,.. 더보기
기로에선 한반도 “자기 중심으로 세계를 볼 수 있고, 자국 중심으로 역사를 볼 수도 있다. 이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만족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세계와 역사의 진실을 알 수 없게 하고, 이들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만든다. 세계와 역사가 온통 복잡하게만 느껴지고, 자기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불만과 분노만이 일어날 뿐이다. 이러한 상태로는 ‘우물 안 개구리’를 면할 수 없다.”- 배기찬,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중에서 냉엄한 현실 속에서 배기찬 전(前) 청와대 동북아비서관은 저서 에서 한반도와 패권세력의 역학 관계에 대한 분석을 했다. 배 비서관은 한반도에서 통일, 분열 등 정치적 대변동은 거의 예외 없이 중국대륙의 패권 변화와 연관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 중국대륙이.. 더보기
북한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이념의 철옹성과 같은 북한에도 변화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북한의 미래를 이야기 할 때 마다 언급되는 것은 후계자 김정은 체제가 지속가능할 것인지와 북한 핵문제 해결 등 지금 당면한 문제들이다. 북한 체제는 단 1년 아닌 수개월 앞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다. 남한 정부도, 북한 전문가도, 언론도, 모두 북한 최고 지도자들의 정치적인 리더십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설사 김정은의 리더십이 굳건해 지고 핵을 통해 나름의 이익을 계속 취하더라도 북한 체제는 10년 안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한은 과거처럼 중앙의 절대 권력이 강력한 정보 통제를 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의 묵인 아래 곳곳에 장마당이 성행하고, 수시로 중국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이 많아졌고.. 더보기
‘고난의 행군 정신’의 뿌리는 ‘우리식 사회주의’ 냉전 시대 사회주의 국가들과 대외 교역 등으로 근근이 나라 살림을 꾸려 나가던 북한은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졸지에 국제 사회에서 외톨이 신세가 된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기 전 북한은 소련 등으로부터 국제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와 원자재를 수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진영이 사라지만서 ‘사회주의 우호 가격’이라는 그들만의 시장 거래가 사라지고, 구 사회주의권 나라들도 자본주의 질서 하에 국가 시장가격에 따라 원자재와 물품을 거래하게 된다. 사회주의 우호 가격 시스템의 붕괴는 북한 경제를 회생 불능의 상태로 빠져 들게 했다. 이미 석탄, 석유를 위주로 한 공업화를 통해 공업국에 들어선 북한의 입장에서는 석유와 석탄의 부족은 곧 비료, 철강, 시멘트,.. 더보기
고난의 행군 정신 백석대 한화룡 교수는 1990년대 후반 탈북자의 수기와 면담을 통해 북한 주민들의 의식 구조가 네 가지 신화로 되어있음을 발견했다. 한화룡 교수가 저서 「4대 신화를 알면 북한이 보인다」에서 밝힌 북한의 4대 신화는 다음과 같다. 1. 김일성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서 조선을 해방 시켰다는 ‘해방신화’2. 북한이 1950년 북침한 미제와 남조선 괴뢰 도당을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승리신화’3. 북한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는 ‘낙원신화’4. 미제와 남조선 괴뢰 도당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불쌍한 남조선 동포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통일신화’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북한 사람들이 남한을 비롯한 바깥세상의 실정을 많이 알게 되었지만 1990년대 까지만 해도 북한은 이와 같은 4대 신화를 바.. 더보기
영화 <굿바이레닌> (2003) - 엄마를 위한 지상 최대의 거짓말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10월 통일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동서독 모두에게 기대감에 가득 찬 설레임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통일 이후 동서독은 서로를 이해하고 세워주는 데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가장 변화의 충격을 크게 받은 부류는 동독지역에 거주하며 과거 사회주의 동독에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질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해야 했고 무엇보다 그들이 믿고 따르던 가치와 신념을 내려놓아야 했다. 독일의 영화 감독 볼프강 벡커는 2003년에 통일 뒤 바뀐 환경 속에 놓여 있는 동독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을 제작한다. 영화 은 베를린 장벽 붕괴의 현장에서 그 사건을 가장 당혹스럽게 만났던 한 가족의 이야기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동독을 끔찍이 사랑하.. 더보기
독일의 부활 그리고 한국 독일의 한 정치학 교수는 동서독 통일을 ‘서로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란 쌍둥이의 재회’라고 표현했다. 40년 동안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란 쌍둥이가 만나 어느 날 갑자기 하나의 가족임을 선언하고 한집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갈등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독일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이 많았다. 통일 비용에 따른 경제적 문제와 정치적 통합은 이루어졌으나 화학적 융합을 이루지 못한 동서독 지역의 사회문화적 갈등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다. 통일의 과정과 통일 이후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독일은 그동안의 부담을 딛고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독일은 2003년 이후 슈뢰더 정부의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로의 개혁으로 경제가 호전 되고 있으며, 동서독 지역 .. 더보기
독일통일, 준비는 했으나.. “다시 통일을 맞이한다면 모든 것을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직후 작센주지사를 지낸 쿠르트 비덴코프는 통일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렇게 말을 했다. 갑자기 이루어진 통일의 수면 아래에는 분단 이후 오랜 기간에 걸친 서독의 노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베를린 장벽 붕괴와 그 이후 통일과정이 급박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상황을 최선의 길로 유도하는데 참고할 수 있는 선례가 전혀 없었다. 언제 다시 통일의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독일 통일은 동독이 서독에 편입되는 흡수통합 방식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흡수통합 방식을 통해 독일은 1990년대 중반 제도적 통합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였다. 하지만 급속한 통합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은 여전히 독일 사회가 짊어져야.. 더보기
독일 통일이 되기까지 로마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독일의 통일도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미·소 양국은 서유럽과 동유럽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막대한 군비경쟁을 벌였다. 군사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주변국 간의 대리전쟁을 통해 영토와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틈 바구니 속에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통일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피폐해진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을 뿐 아니라 대량학살 ‘홀로코스트’로 대변되는 ‘히틀러 독일’의 망령 때문에 통일 독일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주변 국가에게 커다란 부담이기도 했다. 이런 환경 가운데 독일은 과거를 참회하며 동서독 통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위해 조용히 노력했.. 더보기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89년 5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평화 기도회를 마친 수십 명의 시민들은 근처의 아우구스투스 광장으로 향했다. 이들은 공산주의 체제에 항의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교회를 봉쇄하고 시민들을 잡아들였지만 매주 월요일 열리는 평화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자칫 유혈 사태로 번질 수 있었던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니콜라이 교회는 이미 1980년대 초부터 인권과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동독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89년 5월 7일 지방선거였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동독 공산당은 자신들이 지정한 후보에 대한 찬반 의사만을 묻고 99% 가까이가 찬성한 결과를 발표했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라이프치히에서 시작..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