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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영화 <화려한 휴가> (2007) - 다만 꿈이기를 바랬습니다. 김지훈 감독의 영화 는 광주민주화운동의 복합적인 원인을 들추어내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웃들이 살고 있었던 광주를 설명한다. 1980년 5월, 광주에 사는 택시기사 민우(김상경)는 동생 진우(이준기)와 단둘이 산다. 민우는 오직 착하고 똑똑한 고등학생 진우만을 바라보며 성실하게 살아 간다 . 또한 민우는 진우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신애(이요원)를 맘에 두고 사춘기 소년 같은 구애를 펼치는 순수함도 갖고 있다. 소박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 나라를 지키고 시민들을 보호해야 할 군인들이 총, 칼로 무장한 채 도심 한복판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폭행하고 심지어는 죽이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억울하게 친구, 애인, 가족을 잃은 민우를 비롯.. 더보기
‘아침이슬’을 다시 듣게 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한국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다양한 이야기와 논의를 할 수 있는 합법적 공간이 넓어지면서 그동안 억눌려 왔던 다양한 운동들이 분출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민운동 세력의 등장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각종 시국사건을 맡아 변론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해온 인권변호사들이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민변)’을 발족시켰으며, 1989년에는 서경석 목사를 중심으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후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이 만들어졌고 한국은 아시아에서 시민운동이 가장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6월 민주항쟁은 우리에게 한층 진일보된 표현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금지된 노래의 해금(解禁)이다. 양.. 더보기
1987년 6월의 함성 박정희 대통령 시해 후 불었던 민주화의 바람 ‘서울의 봄’은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그 막을 내렸다. 그 후 얼마간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는 지하로 숨어 들어야했다. 주요 야당 정치인들은 정치 활동이 규제되었고 대학가에는 경찰이 상주해 학생들의 동태를 살폈다. 군사독재에 저항해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기존의 정치적 민주화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중심축을 이루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보며 자유주의적 틀을 넘어서 보다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려는 급진적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미국에 반대하는 반미운동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생산자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진보적 민주화운동, 좌파 민주화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소위 ‘주사파’라 불리는 ‘민.. 더보기
‘긴급조치’는 왜 그리도 많이 필요했을까? 1960년대 민주화운동은 쿠데타로 집권한 국가권력 대한 비판이 가장 커다란 이슈였다. 군사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특수 상황으로 인해 이 흐름은 19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이어진다. 1970년 11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장이 모든 것을 앞서는 시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는’ 당시 노동자들의 삶이었다. 민주화 운동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고 더 나아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기도 했다. 민주화 운동의 중심세력은 재야세력과 학생 운동그룹이 그 주를 이루었다. 훗날 역사는 이들을 ‘긴급조치 세대’라 불렀다. ‘긴급조치’는 제4공화국 헌법(유신헌법)에 규정되어 있던, 헌법적 효력을 가진 특별조치로 대통령이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조치.. 더보기
“잘 돼갑니다(?)” 1967년 가을, 이승만 정권 말기의 3·15 부정선거, 이 대통령의 하야와 망명, 이기붕 일가의 집단자살 등 4․19 혁명을 다룬 정치성이 짙은 영화 가 촬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김지미(박 마리아), 장민호(이기붕), 박노식(조병옥), 허장강(최인기 내무장관), 김희갑(이발사) 등 당대 일류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다. 이화장(이승만 생가)과 조병옥 생가 등 역사의 현장에서 촬영이 이루어졌으며, 이승만 대통령과 닮은 배우를 찾기 위한 공개 오디션을 하는 등 최고의 배우들과 정부 당국의 적극적인 촬영 협조로 영화는 흥행 성공이 예고되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68년 1월 30일 촬영이 끝난 후, 이 영화는 정치 세태를 풍자했다고 해서 오랫동안 상영이 보류됐고 20년 후인 1988년에 와서야 상영금지가 .. 더보기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한국은 식민지배와 전쟁, 가난의 역경을 딛고 눈부신 경제 발전과 사회 성장을 이룩한 지구상 유일한 나라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여 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기적'의 역사다. 만약, 우리가 경제 발전만을 이야기하면 한국은 그렇고 그런 졸부(猝富)의 나라에 불과할 것이다. 한국이 경제 발전과 함께 내세울 수 있은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시민의식의 성장이다. 경제적 자유와 공정한 경쟁을 요하는 시장경제는 민주주의와 더불어 성장·발전한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주의를 .. 더보기
1980년 5월 광주 호남인들은 19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광주의 아픔은 민주화의 대한 열망이기도 했고, 개발 시대 소외되었던 호남 지역의 울분이었다. 또한 시민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군대가 오히려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 정권의 몰락으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염원은 실현되는 듯 보였다. 답답했던 유신의 두꺼운 옷을 벗고 민주화의 새 시대에 어울리는 따사로운 봄볕이 곧 오는 듯 했다. 사람들은 이 짧은 해빙의 순간을 ‘서울의 봄’이라 불렀다. 하지만 육군 소장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반란으로 ‘서울의 봄’은 꽃망울도 제대로 피워 보지 못하고 이내 시들어 버렸다. 1980년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김대중, 김영삼 같.. 더보기
전설의 프로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와 ‘호남’ 해태 타이거즈(현재 기아 타이거즈)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사라지지 않는 전설이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광주와 전라남북도를 연고지로 창단된 해태는 19년 동안 무려 9차례나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미국의 뉴욕 양키스(약 26%)와 일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약 30%)에 비해 높은 우승 비율이다. 해태는 9차례 한국 시리즈에 진출해서 9번 모두 패권을 거머쥐었다. 한국 시리즈 진출만 놓고 보면 승률이 100%이다. 더욱이 1986년부터 1989년 시즌까지 한국 시리즈 4연패를 달성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해태의 기록은 좀처럼 깨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였던 1980년대 광주일고, 광주상고, 군산상고 등 호남권 학교에서는 매년마다 우수한 선수가 쏟아져 나왔다. 해태는.. 더보기
조정래의 소설 <한강> 1990년대 중반 한국 사회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것을 보며 소설가 조정래는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의 GDP가 1만 달러가 되었고, OECD에 가입해야 된다고 분주해 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당시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 사회는 국민소득 1만 달러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했다. 꿈처럼 여겨왔던 1만 달러의 달성이 놀랍기도 했고 그 다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 없이 통계 수치상의 선진국 진입을 이야기했다. 이 무렵 조정래 작가는 불후의 명저인 과 을 거쳐 해방 이후를 다룬 새로운 대하소설 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조정래 작가가 을 집필하려고 했던 의도는 비교적 간단했다. 시위 때문에 나라 망한다고 시끄러운데 나라는 망하지 않고 오히려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 더보기
번영의 시대 ‘원조(援助)’로 허기를 달래다 설탕은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단맛을 내는 식품이다. 십자군 운동을 통해 사탕수수의 재배와 제당 기술이 유럽에 전해진 이후 설탕은 상류층만이 즐길 수 있는 귀한 기호식품이었다. 콜럼버스가 서반구를 향해 떠났던 두 번째 항해에서 사탕수수를 가져갔던 것 역시 상품의 지배를 위한 전략이었다. 우리나라에 설탕이 처음 들어온 것은 12세기 고려 명종 임금 때다. 가격이 비싸고 수입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보통 사람들이 설탕을 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설탕은 최고의 고급 선물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 국민들이 비교적 저렴하게 설탕을 먹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부터다.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일선에서 직접 ‘제당기술’ 개발에 참여했다. 설탕의 원료가 되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