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인들은 19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광주의 아픔은 민주화의 대한 열망이기도 했고, 개발 시대 소외되었던 호남 지역의 울분이었다. 또한 시민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군대가 오히려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 정권의 몰락으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염원은 실현되는 듯 보였다. 답답했던 유신의 두꺼운 옷을 벗고 민주화의 새 시대에 어울리는 따사로운 봄볕이 곧 오는 듯 했다. 사람들은 이 짧은 해빙의 순간을 ‘서울의 봄’이라 불렀다.
하지만 육군 소장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반란으로 ‘서울의 봄’은 꽃망울도 제대로 피워 보지 못하고 이내 시들어 버렸다. 1980년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김대중, 김영삼 같은 정치인들과 주요 사회 인사들이 체포되거나 가택연금을 당했다. 민주화 운동의 싹을 자르기 위해 전국 주요 대학의 학생운동 리더그룹과 교수들, 재야인사들에게도 동일한 탄압이 가해졌다. 공포와 두려움이 한국 사회에 엄습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공권력’이 말 하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 격리하고 야만적인 폭력을 가했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신군부에 의해 무너져 내려갔다. 단, 전라남도 광주를 제외하고 말이다.
1980년 봄, 전라남도 광주에서도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생을 중심으로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비상계엄 해제, 노동3권 보장, 정치일정 단축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980년 5월 17일 밤 1천여 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대와 조선대를 점거한 이후부터 상황은 급박해지기 시작한다. 계엄군의 일방적인 무력진압으로 유혈사태가 발생되고 이를 계기로 시민들의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만행에 시민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방법들 찾기 시작했고 이에 시민 스스로 시민을 지키기 위해 인근 경찰서에 들어가 무기를 탈취해 자체 무장을 하기도 했다.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서나 광주시내는 거의 전쟁상태로 돌변했다. 단순한 군대의 진압으로 끝날 줄 알았던 광주의 시위는 소수의 학생 시위대와 군대의 구도가 아닌 광주시민 전체와 진압군의 대결 형태로 바뀌며 거대한 시민 저항운동으로 번지게 된다. 이러한 광주시민의 항쟁은 10일간 계속되었고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무력 진압되며 끝을 맺는 듯 보였다.
하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광주에서의 항쟁은 시대와 지역을 너머 사람들의 가슴속에 전해지며 한국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정신적 가치가 되었고, 이후 민주화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의 실제 소식이 밖으로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들은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침묵하거나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왜곡 보도를 했다. 이때 기독교방송(CBS) 만큼은 광주의 소식을 비교적 소상하게 보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기독교방송(CBS)은 그해 겨울 뉴스 보도기능을 박탈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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