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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번영의 시대

‘원조(援助)’로 허기를 달래다


설탕은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단맛을 내는 식품이다. 십자군 운동을 통해 사탕수수의 재배와 제당 기술이 유럽에 전해진 이후 설탕은 상류층만이 즐길 수 있는 귀한 기호식품이었다. 콜럼버스가 서반구를 향해 떠났던 두 번째 항해에서 사탕수수를 가져갔던 것 역시 상품의 지배를 위한 전략이었다. 우리나라에 설탕이 처음 들어온 것은 12세기 고려 명종 임금 때다. 가격이 비싸고 수입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보통 사람들이 설탕을 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설탕은 최고의 고급 선물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 국민들이 비교적 저렴하게 설탕을 먹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부터다.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일선에서 직접 ‘제당기술’ 개발에 참여했다. 설탕의 원료가 되는 원당은 미국의 원조에 의해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전쟁 이후 한국 경제는 미국에 크게 의존했다.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 물품은 전쟁 피해 복구와 생선시설 회복에 필요한 원조와 함께 생활필수품과 밀, 원면, 원당 등 소비재 산업의 원료가 주를 이루었다. 미국에서 온 원조 물품들 중 상당수는 교회와 기독교 계통의 사회단체들을 통해 국민들에게 배급되기도 했다. 이 같은 미국의 원조는 전후 복구 사업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일과 식량 부족을 해결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미국의 원조 물자가 들어오던 1950년대 국내 산업 가운데 가장 비약적으로 성장한 산업은 다름 아닌 원조 물자를 가공하는 산업이었다. 밀가루, 원면, 설탕 등 원조를 통해 수입한 물품을 가공하여 얻어지는 제품이 모두 흰색이라 이를 가공하는 제분, 면방직, 제당 공업을 삼백(三白)산업이라 불렀다. 삼백산업은 원료의 90% 이상을 원조물품이나 수입품에 의존한다는 문제점이 있었으나 전후 경제를 복구하는데 나름대로의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런 산업 구조는 실질적으로 국가 경제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즉, 외자에 의한 미국의 경제 원조 프로그램 속에서 높은 대미 경제 의존도를 보이고 있었다.



경제기적의 신호탄


원조에 의존하던 한국 경제가 체질 개선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들어선 제2공화국 정부는 장면 총리를 중심으로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리더십의 부족으로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고 다양한 의견들을 조율하지 못했다. 결국 군인들이 일어났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한강 다리를 넘어 서울에 진입했다. 다음 날 새벽 라디오를 통해 군사 쿠데타의 성공을 알리는 메시지가 세상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군사혁명위원회는 5․16 군사쿠데타의 이념과 성격을 밝힌 6개항의 성명을 발표한다. 6개의 항목 중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는 제4항에는 국가 경제발전에 대한 비전이 제시되었다.


경제 개발을 위해서는 먼저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 나라의 곳간은 텅 비어 있었다. 해외에서 돈을 빌려와야 했지만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되는 한국에는 신용도, 담보도 없었다. 결국 정부는 국민 정서를 뛰어 넘는 과감한 돌파전략을 취한다. 일본과 수교를 하면서 일종의 식민지 배상금인 ‘대일 청구권 자금’을 얻었다.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고 이들의 급여를 담보로 차관을 들여오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달러를 벌여 들였고 석유파동을 역이용하여 건설기업과 노동자들이 열사의 땅 중동으로 나갔다.


정부의 수출주도 전략과 한국인 특유의 근성으로 경제개발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점차 자본의 여력이 생기게 되면서 경공업을 넘어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게 된다. 울산석유화학공단, 포항제철 등이 다 이때 만들어졌다. 또한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며 국가산업의 동맥을 구축했다. 


특히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은 정치적인 반대가 심했다. 야당 뿐 아니라 여당인 공화당에서도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비용과 시기, 기술상으로 아직 우리나라에는 고속도로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심지어 국제금융기관인 IBRD(지금의 World Bank)마저도 서울-부산의 남북 축 대신 낙후된 서울-강릉에 도로를 먼저 개선하라고 권고할 정도였다. 반대론자들은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들었지만 지금 한국경제를 논할 때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대승적인 결단이 없었다면 경제 발전은 더욱 더디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한국의 빠른 경제 성장은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까지 계속 이어진다. 그 사이 경제개발을 시작한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에게 암살당하고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군사정권이 연장되었지만 경제개발의 고삐는 놓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 3차 석유파동으로 세계 경제가 어려워져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한 적도 있으나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갔다. 1980년 대통령에 오른 전두환은 정치를 규제하는 대신 사회적 제약들을 풀고 새로운 문화 상품을 만들었다. 시대의 요구에 맞춰 컬러TV 방송이 시작되고, 교복 자율화와 야간통행금지 해제, 대학 입학정원 확대 등이 이루어졌다. 철저히 통제되던 외국산 물품 수입이 자유화 되었고 국민들의 해외여행도 부분적으로나마 자유화 되었다. 아울러 프로야구, 프로축구가 만들어졌고 일명 ‘애마부인’으로 대표되는 성인영화 붐도 일어난다. 1980년대 초 한국은 흑백에서 컬러로 가는 변혁의 시대였다. 단 정치만 빼고 말이다.


1980년대 중반 한국 경제는 최고의 호황기를 맞는다. 일명 저유가, 저금리, 저원자재의 3저 호황이다. 에너지와 각종 원자재를 싼 가격에 사올 수 있었고, 금리가 낮아 쉽게 자금을 융통 할 수 있었다. 달러 약세와 일본 엔화의 강세로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수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전두환 때는 물가만큼은 확실히 안정되어 있었다.”라는 말의 배경에는 이 3저 호황이 있었다.


1986년 ~1988년 한국 경제는 연 12%의 경제성장(지금은 연 3% 수준)을 기록했고, 건국 이래 최초로 무역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세계 경제사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연평균 수출신장률 40%, 그리고 연평균 경제성장률 9%를 이루어 냈다. 한국경제는 1960년대에 시작된 경제개발계획과 1970년대 육성된 중화학 공업을 통해 안정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으며 해외 수출을 다변화하고 반도체 산업을 새로 육성하는 등 변모를 도모했다. 특히 삼성전자의 반도체와 현대자동차는 한국 경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혜안이 있는 선택 이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놀라운 발전상을 ‘한강의 기적’이라 불렀다.



세계 속으로


‘분단’과 ‘성장’의 틀 속에 있던 한국은 국제 사회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외부와 소통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맞이한다. 그것은 바로 1988년에 서울에서 열린 제24회 하계올림픽이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잡고


Hand in hand we stand all across the land

We can make this world a better place in which to live

Hand in hand we can start to understand

Breaking down the walls that come between us for all time

Arirang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의 세계는 냉전의 끝 무렵이었다.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시작된 올림픽은 한국계 그룹 코리아나와 관객들이 ‘손에 손잡고’를 다함께 부르며 그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이 노래의 영문 가사인 ‘Breaking down the walls that come between us for all time’처럼 동서 냉전의 상징인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연이어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공교롭게도 이 올림픽은 당시 세계 스포츠 최강국이었던 소련이 소련이란 이름으로 참가하는 마지막 올림픽이 되고 말았다. 큰 틀에서 세계를 양분하던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세계는 하나의 큰 마을이요 큰 시장인 지구촌 시대로 접어들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토마스 프리드먼은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를 통해 오늘날의 시대를 규정짓는 거대담론으로 세계화를 지목하고, 그에 관한 포괄적이면서도 독창적인 시각을 잘 드러냈다. 세계화는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나 그저 흘러가고 말 유행이 아니었다. 세계화는 냉전체제를 대치하는 새로운 국제 시스템으로서 매우 융통성 있으면서도 상호 연결된 체제로, 국경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자본, 기술, 정보의 통합을 말한다. 세계화에 의해 지구는 단일의 글로벌 시장으로 바뀌고, 지구 전체가 하나의 마을처럼 변해 가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 체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 아침에 듣는 뉴스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의 투자가 제대로 된 것인지조차 판단하기 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세계화는 한국에게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1993년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32년 만에 군 출신이 아닌 민간인으로 집권한 김영삼 대통령은 정권 초기 금융실명제 등의 개혁정책을 실시하며 국민적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세계화’를 국정의 기치로 내세우며 각종 규제와 개혁․개방을 추구하였고, OECD에 가입하는 등 당시 한국의 경제체력에 맞지 않는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었다. 즉, 국내 기업이 외풍에 대하여 대항할 체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방문을 열어제낀 것과 같았다. 결국 한국 경제는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라는 큰 경제적 태풍을 맞게 된다. 한보철강의 부도로 촉발된 기업의 연쇄부도와 동남아에서 시작된 IMF 외환위기는 한국에게 고통과 시련의 시기였다.


IMF 외환위기 당시 은행들은 자신이 부도를 막기 위해 기업 대출을 하지 않게 되고, 기업의 돈줄이 막히면서 흑자 기업이 도산하는 일도 나타났다. 기업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기에 대비하기 위하여 신규 사업을 추진하지 않았고, 정리해고를 통해 비용을 절감해 나갔다. 또한 설비 시설을 확충하지 않고 기존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며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쳤다. 또한 정리해고와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가 양산되고, 전반적인 경기 침체로 자영업자들의 연쇄 도산이 이어졌다. 세계화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외국의 것들을 받아들이는 달콤함도 있었지만, 오직 효율성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는 한국 경제를 순식간에 삼켰고 우리국민들은 허리띠를 더욱 졸라 매야 했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높아진 환율로 기업의 제품 경쟁력이 살아났고,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한 금모으기운동을 통해 장롱 속에 묻혀있었던 패물들이 밖으로 나왔다. 정부도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무너진 국가경제를 다시 살리고자 노력했다. 뼈를 깎는 고통 속에 한국 경제는 다시금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IT 붐을 타고 한국 경제는 새롭게 부활했고 한국의 잠재력이 ‘지식경제’의 파도를 타며 세계 곳곳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결국 한국은 2012년 인구 5,000만 명을 넘어서며 7번째로 ‘20-50클럽’(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인구 5000만명)에 가입했다. 지구상에 20-50 클럽은 우리 이외에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뿐이다. 국제사회에서 1인당 소득 2만달러는 선진국으로 들어가는 소득 수준이며 인구 5,000만명은 인구 강국의 기준이 된다. 1996년 영국이 진입한 이후 16년 만에 한국이 세계에서 7번째로 진입했다. 한국은 이제 세계 경제의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편입 되었다.



통일시대를 대비한 삶의 질


그동안 빠른 경제 성장의 뒷면에는 어두운 그늘도 있었다. 성장에 치우쳐 노동자들의 복지는 한참 밀려나 있었다. 노동자의 인권은 보장받지 못했고, 일한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도 못했다. 1970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과 1987~8년 노동자 임금 투쟁은 노동자들의 의식을 깨우며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개발 시대의 한국경제는 선택과 집중의 논리가 적용 되면서 지역 간의 성장 불균형을 가져왔다. 개발 과정에서 시작된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앙금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또한 산업화가 진전되고 생산인력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농촌의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형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 인구 5천만명, 국민소득 2만달러를 넘어선 한국은 통일 시대를 대비하여 공동체와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초점을 둔 국가 장기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아울러 미래성장 동력을 꾸준히 발굴하여 지속 가능한 성장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인구가 7,200만 명에 이르며 경제규모도 커져서 수출 중심의 해외 의존형 성장보다는 내수 중심의 보다 안정된 성장이 어느 정도 가능해진다. 일본이나 미국은 전체 경제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70~80%가 넘는다. 즉, 통일 후 통일 후유증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해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한국 경제는 세계적인 슈퍼파워로 불릴 일명 ‘40-80클럽’에까지 진입할 가능성도 있다.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인구 8,000만 명 클럽에 진입한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세 나라밖에 없다. 이는 우리가 꿈꾸는 통일한국의 새로운 목표 중에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