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통일을 맞이한다면 모든 것을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직후 작센주지사를 지낸 쿠르트 비덴코프는 통일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렇게 말을 했다. 갑자기 이루어진 통일의 수면 아래에는 분단 이후 오랜 기간에 걸친 서독의 노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베를린 장벽 붕괴와 그 이후 통일과정이 급박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상황을 최선의 길로 유도하는데 참고할 수 있는 선례가 전혀 없었다. 언제 다시 통일의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독일 통일은 동독이 서독에 편입되는 흡수통합 방식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흡수통합 방식을 통해 독일은 1990년대 중반 제도적 통합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였다.
하지만 급속한 통합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은 여전히 독일 사회가 짊어져야 할 짐이 되었다. 통일비용 부담으로 성장률이 후퇴하고 재정적자가 늘어났고, 통일비용의 절반 이상이 소비성 항목으로 지출되었다. 통일 다음해인 1991년부터 2005년까지 15년 간 총 1조 4,000억 유로(약 2조 7,000억 마르크, 1,750조 원)의 통일비용을 지출했다. 매년 연방예산의 25~30%, 국내총생산(GDP)의 4~5%를 통일비용으로 지출한 것이다. 통일비용 가운데 실업급여 등 소비성 지출이 60%에 달한 것은 통일 독일의 경제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통일 전 서독은 유럽국가 중 가장 건전한 재정 상태를 유지해왔으나 통일 후 재정적자가 대폭 확대되어 1990년부터 2007년간 연평균 464억 유로의 재정적자를 기록했고,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이 유럽연합이 규정한 상한선(GDP의 3%)보다 높은 경우가 많아 ‘유럽의 문제아’ 또는 ‘유럽의 병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적 부담은 각종 보험료의 인상, 보험 및 감세 혜택의 축소 등이 이어져 가정 경제를 압박하고 투자부진으로 이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동서독 국민들은 모두 사회적, 심리적 후유증을 겪었다. 동독 주민들은 지난 45년간의 세월을 백지로 돌리고 시장보기에서부터 직업선택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 동독시절에는 공산권 가운데 가장 근면한 국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세계 10위의 공업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졌으나, 통일 후 이등 국민의식과 실업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서독 주민들도 불만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통일비용 조달을 위해 각종 세금이 인상된 데다 통일 이후 경제, 복지 및 치안 문제 등에서 안정기반이 흔들리게 되자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통일초기에는 통일에 따른 조세부담이 크지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여러 가지 명목으로 세금이 인상되었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부담과 따로 살았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가중되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인식이 높아지고, 동서독인들이 서로 상대를 비하하는 ‘오씨’(Ossi), ‘베씨’(Wessi)라는 용어도 생겨나고 동서독 주민간의 갈등도 깊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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