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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독일 통일이 되기까지






로마의 역사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독일의 통일도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미·소 양국은 서유럽과 동유럽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막대한 군비경쟁을 벌였다. 군사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주변국 간의 대리전쟁을 통해 영토와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이런 틈 바구니 속에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통일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피폐해진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을 뿐 아니라 대량학살 ‘홀로코스트’로 대변되는 ‘히틀러 독일’의 망령 때문에 통일 독일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주변 국가에게 커다란 부담이기도 했다. 이런 환경 가운데 독일은 과거를 참회하며 동서독 통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위해 조용히 노력했다.


서독은 동서독을 둘러싼 주변국 뿐 아니라 미국, 소련 등이 모두 연관된 국제문제의 성격을 갖고 있는 독일통일 문제를 다루기 위해 다양한 접근을 시도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에 대한 친서방정책을 통해 전범국으로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냉전기를 지나 화해 분위기에 들어서자 동구권의 국가들과도 우호 관계를 맺었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이 아닌 서방과 동구권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틀 속에서 서독은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특히 1960년대 말 언젠가는 이루어질 그날을 꿈꾸며 서서히 통일작업에 들어갔다.


1969년 취임한 빌리 브란트 총리는 이러한 정책기조에 입각하여 동서간 긴장완화를 위해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1970년 브란트 총리는 한때 자신들의 지도자 히틀러가 주도한 나치즘의 피해 당사자인 이웃 폴란드를 방문해 무명용사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브란트의 충격적인 사죄에 폴란드 국민들과 세계는 독일의 진정성을 느꼈다. 독일의 참회는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폴란드와 독일 간에 갈등요소로 존재해왔던 국경선 문제에서 이전에는 독일 영토였던 포메라니아, 실레시아, 東프러시아 등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했던 것이다.


1945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동쪽에서 소련이 차지한 폴란드 영토를 보상하기 위해서 위에 언급한 독일의 영토를 폴란드에 합병시켰다. 이로 인해 이 땅에 거주하던 약 600만 명의 독일인들이 서족으로 이주해야만 했던 아픔의 역사가 배어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 땅을 순순히 폴란드 영토로 인정하고, 현재의 오더-나이제 국경선을 인정한 것이다.


브란트 총리는 동독에 대해서는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ehrung)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1973년 동서독 유엔 동시가입, 양독 관계 개선, 민족의 동질성 유지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서독은 국제법적으로 동독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하였다. 브란트는 동서독이 하나의 민족이지만 가까운 장래에 통일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불필요한 희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동서독간의 화해를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독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도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동서독 양측은 적대적 감정을 유발하는 이데올로기 대립을 최대한 자제하고자 했고 하나의 독일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두 개의 독일이 공존하는 것을 받아 들였다. 그리고 동서독의 관계는 외국간의 관계가 아닌 ‘민족적인 특수 관계’임을 강조했다.


서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룬 일명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서독의 탄탄한 경제력은 소련 및 동유럽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련 역시 사회주의 종주국이긴 했으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 아니었기에 서독의 경제 지원을 받아 들였다. 서독과 소련은 경제지원과 군축을 맞교환하며 독일 통일의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이러한 결과, 1988년과 1989년, 서독 수상 콜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각각 모스크바와 서독의 수도 본을 방문하였다. 


이처럼 서방 뿐 아니라 동방과의 균형적 관계를 통해 동독과의 관계를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했던 서독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동독 수상 호네커도 서독을 방문 했다. 서독은 먼저 친서방정책을 통해 서방의 신뢰를 얻은 후 점차적인 동방정책을 취하며 동서방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애썼고 양측을 연결하는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자신의 입지와 통일 환경을 구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