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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영화로 읽는 통일코리아

영화 <흑수선> (2001) - 최후의 증인




영화 <흑수선>은 반세기동안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삶은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비극적인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서울 한강에 한 노인의 시체가 떠오르며 시작된다. 그 시체는 1952년 당시 탈출 포로 검거 일을 했던 양달수(이기영)였다. 이 살인사건을 맡은 오병호 형사(이정재)가 손에 쥔 단서는 현장에서 발견된 금속안경, 명함 조각, 그리고 양달수의 방에서 발견된 두 장의 사진이다. 오형사는 사진의 장소인 거제 옥천초등학교를 찾았고 거기에서 오래된 손지혜(이미연)의 일기장을 발견하게 되고, 거제포로수용소를 둘러싼 비밀을 알게 된다. 한국전쟁당시 탈출포로 검거일을 했던 양달수는 남로당원 손지혜를 데리고, 어느날, 거제도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손지혜를 사랑하던 황석(안성기)이 비전향 장기수로 형을 살다가 최근에 출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형사는 양달수의 피살현장에서 발견된 안경테의 주인이 일본인 사업가 ‘마에다 신따로’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빨치산 출신으로 손지혜와 함께 탈출하다 총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한동주(정준호)가 일본에서 마에다 신따로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포로들중에 틈틈이 탈출을 시도하는 열성분자들이 있었으며 나의 임무는 그들의 탈출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손지혜)


1952년 당시남로당 간부의 딸인 손지혜는 자의로 남로당에 들어가 흑수선이라는 암호명으로 포로 수용소에서 친공 포로들의 탈출을 돕는 일을 맡고 있었다. 탈출대 대장인 한동주는 강만호(강성진) 등과 함께 탈출에 성공하지만 거제도 일대에 국군 수색대가 경계를 강화하는 바람에 인근 소학교로 피한다. 한동주는 땅굴을 파서 도주하려 하지만 강만호가 양달수에게 투항하며 탈출한 포로들의 은신처를 알려준다. 


국군의 소탕작전으로 한동주, 황석, 손지혜를 제외한 모든 포로들이 전멸한다. 도피 과정에 붙잡힌 한동주는 소학교 동문인 양달수와 거래하여 손지혜의 피신처를 알려주고 자신은 총살당한 것으로 위장하고 일본으로 도주한다. 한동주의 밀고에 의해 발각된 손지혜와 황석은 나란히 감옥에 갇힌다. 양달수는 손지혜에게 황석을 석방시켜준다는 명목아래 아버지의 유산을 자신에게 양도하고 자신과 동거하기를 제의하고 황석만을 생각한 손지혜는 양달수의 제의에 응한다.


“황석 오빠는 천둥이 울리고 폭풍이 불어와도 내가 쉴 수 있는 아늑한 나무 그늘 과도 같은 존재였다” (손지혜)


황석도 양달수의 말에 속아넘어 손지혜의 모든 죄를 덮어쓰고 비전향 장기수로 49년간 복역하다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게 된다. 오형사의 추적 끝에 양달수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한동주는 자신이 진범이 아님을 밝히며 자살한다. 한동주가 죽은 이후 손지혜는 오형사에게 범행의 동기를 설명하다 있던 저격수의 총에 맞아 죽는다. 그리고 평생 그를 사랑했던 황석은 손지혜의 시신 앞에서 오열한다.


“지혜, 네가 이 세상에 없는 거면 나도 없는거야.” (황석)





거제도 포로수용소


영화 <흑수선>의 배경이 되는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1950년 국제협약인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협약」에 따라 세워졌다. 포로수용소는 ‘포로들에게 위협이 없을 정도로 전투 지역에서 충분히 떨어진 지역에 소재’ 한다는 협약 규정에 따라 만들어졌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으로 포로 관리에 인력과 경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 급수가 용이하다는 점, 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포로 수용 규모는 처음에는 6만 명이었으나 나중에 22만명 규모로 확대되었고 최대 17만명이 수용 되기도 했다. 이렇게 거제도는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전장은 아니었으나 포로수용소가 세워지며 후방 지역에서 가장 위험하고 문제 많은 곳이 되어 버렸다.


포로수용소는 처음에는 국군과 유엔군의 경비 하에 포로자치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휴전회담이 진전 되면서 포로 송환 문제를 놓고 북한으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와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포로로 갈려 사사건건 대립 결국에는 유혈 사태까지 일어나게 된다. 포로의 전원 북송을 주장하던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부에 조직을 만들어 소요 및 폭동 사건을 일으켰으며, 1952년 5월 친공포로들이 수용소장 프랜시스 도드(Francis Dodd) 준장을 납치하는 이른바 거제도포로소요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상의 눈과 귀가 한반도 남단 거제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포로들의 이념전쟁에 주목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친공포로에 대한 유엔군 쪽의 강력한 저지로 프랜시스 도드 준장이 구출되면서 사건은 매듭지어졌으나, 반공 포로와 친공 포로 간의 싸움은 더욱더 극렬해져서 마침내 따로 떼어놓게 되었다. 1952년 8월까지 북한으로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들은 거제도를 비롯하여 용초도·봉암도 등지로,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부산 등 타지역으로 이송되어 소규모로 분산되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된 뒤 거제도에 수용된 친공포로들이 모두 북한으로 송환됨에 따라 자연스롭게 포로수용소도 폐쇄되었다.



북한에 잡힌 국군포로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전쟁중 전쟁포로는 주로 거제포로수용소 수용된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 이야기가 대부분 이었다. 북한 공산군 가운데에서도 친공포로와 반공포로 사이의 갈등이 포로 이야기의 주를 이루었다. 이들 대부분은 자유의사에 의해 전쟁 이후 자기가 갈곳을 택했다. 한국이 자유 민주주의 체제이니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다면 북한에 잡힌 국군과 유엔군 포로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1953년 7월 정전 이후 돌아오지 못한 국군과 유엔군 포로는 적지 않다. 이들은 한평생 북녘 땅에서 적성 분자 취급을 받았고 이들의 자손들은 출신 성분의 제약으로 늘 뒤쳐져야 했다.


물론 휴전 이후 북한에서 국군 포로가 송환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휴전 이후 국군 귀환포로는 8,343명, 북한군 귀환 포로는 76,000명이다. 통일부에서 발간한 2012북한인권백서에 따르면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의 규모는 한국전쟁 중 실종된 것으로 신고된 행방불명자 4만1971명, 이중 전사자를 제외하고 1만9409명으로 추정된다. 최종 송환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하며 다수의 실종자는 북한에 억류됐을 것으로 파악되는 실정이다.


국방부는 그동안 일부 보도자료를 통해 생존 국군포로 송환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했다고만 할 뿐 송환을 위한 실질적 노력이나 성과는 찾기 어려웠다. 국군포로의 북한 내 생존 사실은 1994년 故 조창호 중위의 귀환을 시작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북한 체제가 위기 처하면서 국군포로들이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귀환한 국군포로는 80명선이다. 그리고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아직 수백명의 국군 포로가 북한에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사실 이들 대부분은 투철한 사상점 신념에 의해서 북한에 남은 것이 아니며 분단과 전쟁이라는 개인이 도저히 어찌 할수 없었던 역사의 큰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뿐이다. 그들은 영화 <흑수선> 속의 한동수 처럼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는 것을 택했고 손지혜 처럼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했고 황석 처럼 어떤 체제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사람과 사랑을 위해 했으면 그만 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북한에 있었던 국군 포로들은 남한의 북한군 포로보다 선택의 자유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40년 이상 그들은 북한에서는 하층민 그리고 그들이 목숨 걸고 싸웠던 대한민국에서 잊혀진 존재 아니 잊혀져야 하는 존재로 살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