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택>
비전향장기수란 국가보안법·반공법·사회안전법으로 인해 7년 이상의 형을 복역하면서도 사상을 전향하지 않은 장기수를 말한다. 이들은 해방 이후와 6·25전쟁 당시의 빨치산 및 인민군 포로, 6·25전쟁 이후 북에서 남파된 정치공작원, 통혁당사건 등 남한에서의 자생적 반체제 운동가 출신, 1970년대 이후 해외활동으로 체포된 재일동포, 1970년대 중반 이후 각종 간첩단 사건으로 연루된 인사 등으로 분류된다.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가 북송되고 7년뒤인 2000년 9월 남북정상회담 직후 남북의 합의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판문점을 통해 북송했다. 이들은 빨치산 출신 13명, 간첩 출신 46명, 인민군 출신 4명으로 70% 이상이 남파간첩이었다.
홍기선 감독은 1980년대 말에 신문에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가 처음 소개될 때부터 ‘저런 소재가 분단을 가장 잘 이야기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0년도 아니고 43년 10개월 동안 전향서 한 장 안 쓰고 버텼다는 것이 생소했고 가능한 일인지 개인적인 궁금증도 생겼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김선명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선택>을 제작했다.
“사람들은 자유가 감옥밖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게 자유는 감옥안에 있었어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 안에는 양심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김선명)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 이야기는 김선명(김중기)이 서울구치소에서 마포형무소, 그리고 대구를 거쳐 대전교도소로 이감되면서 새로운 감방 동료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높은 담과 사방이 꽉 막힌 방에서 그의 육신은 고통스러웠으나 가슴 속에 품은 희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고 동지들을 만나 추억담을 나누는 재미도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 정치범이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오태식 반장)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무지막지한 전향공작은 모든 것을 앗아가버렸다. 새로 부임한 좌익수 전담반장 오태식(안석환)은 폭력범들을 동원해 전향서를 쓰기를 강요한다. 거듭되는 폭력과 고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신념을 포기한다. 김선명은 동지에 대한 신뢰와 통일에 대한 희망마저 사라진 처지에도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다.
"커다란 사상은 버릴 수 없어도 작은 양심은 버릴 수 없다" (김선명)
김선명에게 선택이란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라 다른 하나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김선명은 사상과 신념을 택한 게 아니라 안락한 삶이나 합리화를 거부한다. 영화<선택>은 역사와 진실의 무게로 관객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만은 아니다. 수인들의 장기자랑, 밥그릇 모스 부호를 이용한 통방(通房) 등 교도소의 생생한 풍경이 약방의 감초처럼 펼쳐지기도 한다.
홍기선 감독은 주인공의 신념을 미화하지도 않았고, 오태식을 인간 말종에 가까운 악역으로 표현하지도 않았다. 김선명과 오태식 모두 분단과 냉전이 낳은 현대사의 비극으로 묘사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진실의 힘이다. 실화를 극화로 꾸민 100여분의 모든 장면보다도 가장 의미있는 장면 김선명이 출감 직후 94세의 노모를 만나는 실제 장면이다. 그토록 바라던 어머니를 그는 45년만에 만나 안아봤다. 그 이념이 뭐고...그 전향서가 뭐길래... 다른 사람은 이해 할 수 없는 그만의 생각 그 만의 방식으로 45년을 버텨왔고 출소한지 5년뒤 그는 북으로 갔다.
김선명 그리고 비전향 장기수
2000년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63명과 함께 북송된 김선명은 1925년 경기도 양평군 태어난 김선명은 보통학교 중퇴뒤 1941년 서울로 이사했다. 태평양전쟁 시기를 공장에서 노동을 하며 보냈고 해방이 되자 좌익운동에 뛰어들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자원입대 하였고 1951년 10월 강원도 철원에서 정찰 임무중 국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김선명은 재판을 통해 무기징역형을 건고 받고 복역했다. 그리고 1995년 출소할 때까지 45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이 기록은 세계 최장기수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라 있다. 특히 그 중 39년은 감방 안에만 갇혀 있어야 했고 21년은 완전한 격리와 침묵 속에 0.75평 남짓한 독방에서 지냈다. 옥살이 중 전향을 권유받았으나 전향하지 않았다. 전향서 한 장만 제출하면 감옥 생활을 끝낼 수 있던것을 그는 끝내 하지 않았다. 한편, 김선명이 인민군에 입대한 사이 아버지와 누이 두 명은 보복 살해되었고, 다른 형제들은 연좌제로 고통을 받아 김선명과 연락을 끊었다.
안보와 인권 사이에서
비전향 장기수를 보는 시각은 국가 안보의 관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인권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안보의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나이가 든 우리의 적(敵)이다. 젊었을때 우리 공동체를 해하기 위해 적군 혹은 간첩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감옥에서도 전향하지 않고 지닌 사상을 유지 했기에 나이가 들어도 그들은 계속 적이라는 논리다.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이들이 갖고 있는 사상은 이들이 선택한 결과이며 전향을 강요할 수 없고 그 사상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이들이 나름 선택한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의견 모두 틀렸다고 할 수 없다. 단지 관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단지 사회 분위기와 여건에 따라 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처리 방향이 달라졌다. 과거 우리 사회가 안보를 절대적을 강조하고 인권을 상대적으로 등한시 했다면 이제는 인권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영화 <선택>도 그런 변화의 한 단면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비전향 장기수의 전향적인 북송은 오히려 북한 사람들에게 남한 체제의 개방성와 다양성을 더 드러내게 만들었다. 북한 당국은 공식적으로 비전향 장기수 송환에 대해 "일찍이 비전향 장기수 송환문제 해결을 위해 그토록 마음써오신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그들이 조국에 돌아온 후에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데려왔으니 마음이 놓인다'고 '이젠 그들이 성심을 되찾고 영광과 행복 속에 여생을 보내도록 하는게 자신의 임무'라고 하시며 그들을 꽃방석에 앉히어 이세상의 모든 복을 누리도록 은혜를 베푸시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의 대외적으로 공식 반응일 뿐 비전향 장기수는 북한 당국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북한을 추종하고 있었지만 생활방식은 오히려 남한 방식에 더 익숙했다. 그래서 북한 체제에 비판도 서슴치 않았고 특히 마음에 안들때는 남한에서 대통령을 비판하듯 북한 최고권력층도 비판했다가 이들을 돌보는 북한 당국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한 적도 있다. 결국, 이들 비전향 장기수 대부분은 북한 일반 주민들과 격리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사상전향을 강요 당했고 북한에 가서는 정치적 캠페인에 동원된 인생을 살아야 했다. 과연 이것이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삶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프랑스 계몽주의 지식인 볼테르의 말을 계속 되새로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지향하는 한반도 공동체의 가치일 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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