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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영화로 읽는 통일코리아

이름도 존재도 없었던 그들의 절규 - 영화 <실미도>(2003)





데탕트시대의 얼어붙은 한반도


사람들은 1960년대 후반 ~ 70년대 중반의 시기를 가리켜 동서데탕트의 시대라 말한다. 데탕트 détente 는 프랑스어로 완화·휴식을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을 양극으로 하는 냉전체제가 수립되었으나 1960년대 말부터 변모의 조짐이 생겨났다. 서독과 일본의 급성장, 중국과 소련의분쟁 등으로 국제정치는 이데올로기보다 국가이익을 우선하게 되었다. 1967년 6월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긴장완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72년 대통령 닉슨이 소련 모스크바와 중국 베이징을 방문함으로써 미 ·소 간의 데탕트가 실현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동서의 긴장완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한국전쟁 이후 여전히 얼어붙은 상태였다. 당시 북한은 빠른 전후복구, 높은 경제 성장,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 진출 등으로 북한 역사상 최대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고 한국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거듭하며 북한을 추격하고 있었다. 긴장 속에서 경쟁관계를 거듭하고 있었던 남북한 사이에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셀수 없이 일어 났으며 간첩을 침투 시켜 전후방을 교란 시킨 사회적 혼란도 있었다. 1968년 1월 21일에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하였던 1.21사태가 일어났다.


그리고 1971년 서울 대방동에서 우리 군경과 정체모를 특수부대원들과의 교전이 벌어진다. 정부는 처음 이들을 무장공비로 발표했다가 나중에 인천 실미도에 있었던 특수임무를 띈 부대원들의 난동으로 정정한다. 이들이 ‘북파공작부대’라고 보도한 언론은 단 한곳도 없었다. 당시 실미도에서 훈련 중이던 특수부대원들은 최정예 살인 병기가 되지만 한반도의 정세변화로 3년여 만에 폐기되고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탈취한 시내버스로 청와대로 향하다가 최후를 맞게 된다. 살아남은 4명의 대원은 이듬해사형을 당한다. 그 후 특수부대의 존재는 세상속에서 잊혀졌다.



영화 <실미도>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1971년 ‘실미도사건’은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로 제작되어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우석 감독은 2003년 소설 <실미도>를 바탕으로 우리 현대사의 가장 냉혹한 사건이면서 역사 속에 지워져야 했던 ‘실미도 사건’을 영상을 통해 재현해 낸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김신조, 북한 124 특수부대원)


영화 <실미도>는 1968년 1월 21일 북한124군 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으로 시작된다. 이 사건으로 생포된 김신조의 ‘박정희 모가지’ 발언은 한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 장면과 함께 영화는 주인공 강인찬(설경구) 살인사건 미수사건을 보여준다. 강인찬은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사회 어디에서도 발붙일 수 없었고 결국 그가 선택한 곳은 어둠의 폭력세계였다.


“연좌제를 끊을 수만 있다면 이 칼 나라를 위해 다시 사용할 수 있나?” (김재현 준위가 강인찬에게)


사형이 언도된 강인찬은 인천의 외딴 부둣가로 끌려간다. 그리고 인찬은 상필(정재영), 찬석(강성진), 원희(임원희), 근재(강신일) 등 강제차출된 31명과 함께 서해안의 외딴섬 실미도로 들어간다. 영화속 북파 특수부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국가권력의 동원에 의해 군인 아닌 군인이 된 이들 31명 앞에 684부대장인 김재현 준위(안성기)가 나타난다.


“우리 부대의 목표는 평양에 침투하여 김일성의 목을 따오는 것이다” (김재현 준위)


이때부터 684부대는 냉철한 조중사(허준호)의 인솔 하에 혹독한 지옥훈련이 시작한다. 그들은 인민군 말투에 인민군가, 인민군 제식훈련 등 철저하게 인민군식 훈련을 받는다. 실제사격과 단체구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지옥훈련을 통해 단 3개월 만에 북파 가능한 인간병기가 되었다.


“남북관계라는 것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거야” (공군사령관이 조속한 북파 공작 재개를 요청하는 김재현 준위에게)


하지만 섬 밖 육지의 상황은 실미도 부대를 창설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국제사회는 이념 갈등에서 벗어나 화해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남북한 관계도 은밀한 곳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북파공작을 위해 의욕적으로 만들어진 실미도 부대는 어느덧 애물단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중앙정보부장이 교체되면서 ‘구시대의 유물’이자 ‘유령부대’가 돼버린 실미도 684부대를 제거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다. 차마 684부대를 자기 손으로 제거 할 수 없었던 김재현 준위는 관련 정보를 684부대의 리더인 강인찬에서 슬쩍 흘리게 되고 실미도 684부대원들은 자신들의 뜻을 실미도 밖의 세계에 전하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다. 단 10여분만에 기간병들을 제압하고 실미도를 접수한다. 그리고 684부대원들은 이렇게 되뇌인다.


“우리 처음부터 그랬던 거예요. 처음부터...아무도 모르게 써먹고 아무도 모르게 없애 버릴 계획 이었던거야.”


“지금 평양가서 김일성 모가지 따와도 우리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는 것 아냐.”


“죽는건 좋다 이거야 그런데 내 무덤에 내 이름 석자도 새길수 없다는 거잖아. 죽더라도 국립묘지에 묻힐 줄 알았는데...”


“우리가 최고? 누가 알아주는데... 다 죽여버리고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그 녀석들이...”


“모르면 우리가 가르쳐 주러 갈수도 있어...”



684부대원들 자신들의 뜻과 의지를 알리고자 실미로를 떠난다. 그리고 인천으로 상륙, 송도 외곽에서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향한다. 전군 비상경계령이 발동된 가운데 이들은 교전 끝에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자폭이라는 최후를 선택한다.



북파공작원 그들의 세계


영화 <실미도>는 1968년 창설된 ‘실미도 684부대’에 관한 영화이며, 영화 속 훈련병들의 출신 성분이나 상황 설정이 과거 혹은 현재의 북파공작부대나 북파공작원의 모든 것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684부대는 이야기는 북파공작원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한국전쟁 이후 북파공작원들은 계속된 남북 대치상황 속에 소리 없는 전쟁을 치렀다. 국가의 부름에 응했던 이들에게 돌아온 건 훈장이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었다. 그리고 비밀엄수를 이유로 그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을 철저히 함구해야 하는 침묵의 삶을 살아야 했다.


중앙일보 2013년 9월 29일자 기획기사 ‘[현장 속으로] 돌아오지 못한 북파공작원 7726명’에 따르면 주로 신체 건강하고 환경이 어려운 고교생이나 20대 초반 청년들이 타깃으로 김일성의 목을 따는 특수부대가 생기는데 죽으면 집안을 일으키고, 살아 돌아오면 거액을 챙길 수 있다는 제안을 통해 부대원을 모집하고 혹독한 특수훈련을 통해 몸을 단련 시키고 북파 되었다. 첩보 수집의 경우 단독 또는 2인 1조를 이뤄 휴전선을 뚫고 들어가 북한군의 새로운 시설이나 장비를 촬영하거나 관측하고 돌아오는 일이 주 임무였고 무장 임무는 10~20명의 팀이 들어가 주요 시설을 폭파하거나 노동당이나 군부의 고위 인사를 테러하는 게 핵심이었다. 물론 생포 시 보안을 위해 군번이나 계급은 없었다. 이렇게 북파되어 돌아오지 못한 공작원이 7,726명이라 한다.


북한에서 작적중 사망한 공작원들은 그 시신이 고향땅에 돌아올 수도 없었다. 북한은 군사정전위를 통해 ‘남측 인원이니 송환하겠다’고 집요하게 제안해왔다고한다. 하지만 우리 정부 입장에선 시신 송환은 곧 북파 공파을 인정하는 셈이 됐다. 이때 우리 군은 “북측의 자작극”이라며 시신인계를 거절했다. 사살된 공비나 남파공작원에 대해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는 건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일했지만 살아남은 이들에게 돌아온 건 멸시와 편견뿐이었다. 북파공작원은 사형수나 무기수를 훈련시켜 써먹는다는 소문은 이들을 괴롭혔다. 제대로 취업이 될 리 없었다. 친구나 이웃도 이들을 피했다. 경찰서 보안 담당 형사에서 늘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해외여행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국가를 위해 일했지만 국가권력은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지 못했고 이웃들은 이들을 외면했다. 시간이 흘러 세상이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얼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녹기 시작했다.


과연 북파공작원에게 나라와 조국은 어떤 의미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