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사건과 영화 <작은 연못>
1999년 9월 미국 AP통신은 1950년 7월 미군이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명령에 따라 300여명을 학살한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일명 노근리 사건이다. 노근리 사건은 1960년 민주당 장면 정권 당시 미군에 이를 소청한 적도 있고 1994년 이 사건을 주제로한 소설이 출간되고 한겨레신문등에서도 보도를 했지만 아는 사람들만 알았을 뿐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1999년 AP통신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이슈가 되었다. 이후 한미양국은 공동조사를 통해 노근리 사건이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임을 공식발표하였다.
그후 노근리 사건은 이상우 감독에서 영화 <작은 연못>으로 제작된다. 영화는 한 여름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에서 시작된다. 전쟁이 터졌으나 이곳 대문 바위골 사람들은 그저 남의일일 뿐이다.
“뭔, 변이 나겄어~ 우리 같은 농사꾼들이야 빨갱이하고 웬수진 일도 없고.”
어르신들은 정자나무를 그늘 삼아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고, 동네 개구쟁이들은 서울 구경 생각에 들떠 노래 경연대회 연습에 열심이다. 공산군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지만 이 마을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치부한다.
“곧 전투가 벌어집니다. 피난 갈 준비를 하십시요” (미군)
그러던 어느 날 미군들이 이 마을을 찾아와 작전지라며 마을에서 떠나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게 된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짐을 싸들고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른 채 곧 돌아오리라는 순진한 믿음을 갖고 무작정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게 된다. 뒷산에서 피신해 있던 마을 사람들은 또다시 남쪽으로 피난가라는 군인들의 말을 듣는다.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또다시 떠나게 된다.
“어떤 피난민도 전선을 넘지 못하게 하라. 전선을 넘으려는 자는 모두 사살하라.” <1950년 7월 24일/미군 제1 기병사단 제8 기병연대 통신>
철로변을 띠라 걷다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폭격을 받게 된다. 철로변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은 가까스로 살아서 철도 아래 굴다리에 숨는다. 하지만 여기서도 미군들의 총격에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언제까지 다리 밑에서 이렇게 숨죽이고 있어야 하나 생각했던 청년들은 흙탕물을 온몸에 덮어쓰고 그 곳을 탈출하려 한다. 그렇게 나가서 꼭 산다는 보장이 없지만 적어도 그 다리 밑에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 해 가을, 이 마을에도 가을이 왔다. 도망쳤던 아이들도 살아 그 마을로 무사히 돌아오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동네 사람들이 학교에 모여 아이들과 함께 음악회를 하는 모습으로 마무리 된다. 아마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미군의 오인 사격이 아니었다면 마을 음악회는 이들의 일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영화 <작은연못>에는 미군과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담겨져 있다. 미국은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생활 전반에 걸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러한 미국과 우리나라의 관계는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한미관계가 오늘날과 같은 긴밀할 양상을 띈 것은 1945년 해방 이후의 일이다. 원래 미국은 제네럴셔먼호사건(1866)와 신미양요(1871) 등으로 인해 우리에게 적으로 인식되었었다. 그러나 중국인 황준현의 저서 <조선책략>을 통하여 우리의 미국에 대한 인식은 변하기 시작한다. 황준현은 미국을 ‘남의 나라와 인민과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는 나라’, ‘약한 나라를 도움으로써 공의를 유지하는 나라’, ‘땅이 넓고, 자원이 많고, 상공업이 발달한 나라’라고 소개하며 남하 정책을 펴는 러시아를 견제하는데 가장 좋은 나라라고 표현했다.
조선정부는 새로이 형성된 긍정적인 미국관을 바탕으로 1882년 미국과 수교를 하게 된다. 이후 미국인 선교사, 상인, 정부 관리 등을 새로운 문물이 조선에 들어왔다. 미국과 교류가 많아 지면서 조선정부는 내심 자신들의 위태로워 질때 미국이 더 많은 도움을 주리라 기대했으나 미국 정부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립 내지 불간섭정책을 취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인정하고 서울의 미국 공사관을 철수하기에 이른다.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는 1941년까지 미국-일본 관계 상호 우호적 이었다. 이 시대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을 향해 나름 구애를 했으나 냉담한 반응만 되돌아 왔다.
해방이후 미국은 우리에게 일제를 물러가게 시켜준 은인이자 대한민국의 탄생을 도와준 후견인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미국의 도움으로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고 미국의 경제적인 도움과 쏟아지는 각종 미국 상품들은 미국을 하나의 이상향으로 바라보게 하는데 충분했다. 무엇보다 6.25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참전은 죽어가는 대한민국을 다시 살려준 고마운 존재였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미국을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면 거의 신성모독에 가까운 취급을 받거나 심할 경우 ‘미국비판=공산주의자’라는 올가미에 씌어져 당사자와 그 주변까지 고통을 받아야 했다.
한국 사회가 미국에 대해 서서히 재인식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 부터다. 1980년 일명 ‘서울의 봄’이라 불린 민주화의 열기를 꺽어 버린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미국이 방관했다는 논리가 대학가에서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면서 기존 ‘독재정권 타도’만을 외치던 시위에 반미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미국 국기인 성조기를 불태우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특히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범죄 행위와 미국에 유리한 조건이 많은 ‘한미행정협정’은 한국 국민으로 하여금 미군뿐 아니라 미국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주한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1992년 윤금이씨 살인사건이나 2002년 효순·미선 장갑차 사건은 반미감정을 부추겼다.
그리고 미국에 대해 기존과 다르게 배우고 생각한 첫 세대인 1980년대에 대학생이었던 이들이 사회의 각 영역에 진출하게 되면서 이들 나름의 방법으로 미국에 대해 해석을 하게 된다. 특히 영화계의 경우 미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하나의 문화 코드로 되버린다. 또한 잊혀졌던 한국 전쟁당시 미군의 양민 오인 사격이었던 노근리 사건이 재조명 되면서 한국인의 정서를 자극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존재는 과거와 다르게 정립되고 있는 중이다. 한국인에게 미국은 그 영향력 만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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