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일한국/영화로 읽는 통일코리아

영화 <포화속으로>(2010) - 학도병, 그들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최후의 보루, 낙동강 전투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은 북한 공산군에 밀려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북한의 남침 1개월이 되는 7월 말. 공산군은 충청도와 전라도을 점령하고 경상도 낙동가 유역까지 들어왔다. 한반도 전체 면적의 90%가 공산군에 점령된 상황에서 하루 빨리 전쟁을 끝내려는 북한 공산군과 북한 공산군을 최대한 저지하며 반격을 노리는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한치도 물러 설수 없는 대결을 벌인다. 낙동강을 사이에 둔 1개월 반에 걸친 공방전은 결국 북한 공산군의 패배로 끝났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 반격을 한다.


낙동강 전투는 치열했던 만큼 희생 역시 컸다. 하루에도 수천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희생된 인원만큼 새로운 병력이 보충 되었다. 전장에서는 늘 병력이 부족하였다. 심지어는 징집연령인 17세가 안 되는 어린 학생들도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어른들의 전쟁에 참가 하게 된다. 전국적으로 대략 5만명이상의 학생들이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이중 7천명 이상이 희생 되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참가했던 학도병들의 희생 하나 하나가 모두 고귀하지만 특히 낙동강 전투의 한복판 이었던 포항지구에서의 학도병들의 희생은 더 없이 귀하다.


1950년 8월 10일 남하 하던 북한 공산군은 경북 포항 북쪽의 흥해를 점령하며 국군 3사단의 퇴로가 차단하여 포항 시내를 고립시킨다. 이 때 포항에는 3사단 후방사령부가 포항여자중학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학도병 71명이 제3사단에 입대하기 위하여 사령부로 찾아왔으나 사령부에는 자신들과 함께할 전투 병력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8월 11일 북한 공산군은 포항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학도병들은 스스로 2개 소대를 편성하여 제3사단 후방사령부 행정요원 60여명과 함께 사령부 주변에서 방어전을 전개, 8월 11일 새벽 4시부터 11시간 동안 북한군의 침공을 저지했다. 이 전투로 그리하여 학도병 48명이 전사하며 등 혈투를 벌였으나, 포항이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고 학도병들은 대부분 산화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영화 <포화속으로>


이재한 감독의 영화 <포화속으로>는 1950년 포항지구 전투에 참여한 71명 학도병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제 어디로 도망 가야합니까? 부산까지 가야합니까? 그 다음엔 바다에 풍덩입니까? (강석대 대위)


국군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포항을 지키던 강석대 대위(김승우)의 부대도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포항을 비워둘 수는 없었다. 강석대 대위는 어쩔 수 없이 총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71명의 학도병을 그곳에 남겨두고 떠난다.


“중대장은 전투 경험이 꼭 있어냐 한다. 그냥 오장범으로 하겠다.” (강석대 대위)


유일하게 전투에 따라가 본 적이 있다는 이유로 장범(최승현)이 중대장으로 임명되고 소년원에 끌려가는 대신 전쟁터에 자원한 갑조(권상우) 무리는 대놓고 장범을 무시한다. 71명의 소년들은 피난민도 군인들도 모두 떠난 텅 빈 포항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 채 강석대 대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영덕군를 초토화 시킨 북한군 진격대장 박무랑 소좌 (차승원)이 이끄는 인민군 766 유격대는 낙동강으로 향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최단 시간내에 부산으로 향하기 위해 포항으로 방향을 돌린다. 박무랑의 부대는 삽시간에 포항에 다다른다.


“정확히 2시간 뒤에 이곳을 공격할 예정이다. 만약, 저 게양대 위에 백기를 걸고 투항한다면 살려줄 것이다.” (박무랑 소좌)


766부대의 박무량 소좌는 학도병들을 공격하기 보다는 먼저 회유해서 설득하려 한다. 학도병 내에서 리더인 장범과 문제아인 갑조간의 다툼이 더 격해지며 북한군과 맞서 싸울 건지 아니면 투항하거나 해산할 건지에 대한 격론이 벌어진다. 이윽고 박무량 소좌가 투항하라고 통첩한 시간이 다다르자 학도병들은 766부대를 향해 먼저 선제 공격을 하고 766부대와 학도병 사이의 전투가 벌어진다. 처음에는 학도병들의 전략대로 진행 되었으나 북한군의 탱크와 장갑차가 등장하며 이내 전세는 역전 되어 버린다. 저항하던 학도병들은 한두명씩 목숨을 잃기 시작하고 학도병들의 희생이 막바지에 다다랐을때 강석대 대위가 어렵게 낙동강 전선에서 병력을 이끌고 도착하여 북한군 766 유격대를 물리친다.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영화 <포화속으로>에는 학도병의 정체성을 묻는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질문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 상황은 3사단 사령부가 있던 포항여중에서 강석대 대위가 71명의 학도병들을 모아 놓고 왜 학도병들이 남아서 포항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때 발생한다. 강석대 대위는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질문을 한다. 이때 학도병들은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이에 강석대 대위는 이러한 말을 던진다. “너희들의 조국이다. 반드시 지켜낼 거라 믿는다.” 그리고는 학도병들만 남기고 다른 병력들과 함께 떠난다. 강석대 대위는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군인이 되어서 싸우라는 의미의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북한군 766 부대와의 전투에 앞서 학도병 중대장 오장범이 다른 학도병들에게 말하며 전의를 다지는 상황이다. “강석대 대위가 우리에게 물었다. 학도병은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이에 학도병들은 한 목소리도 대답한다. “학도병은 군인이다.” 남이 자신들 신분의 정체성을 정의해 주기전에 학도병들이 스스로 싸우는 군인이라도 대답했다.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학도병은 군인이다.’ 라는데에 있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군인인지 잘 몰랐던 학도병들의 여러 과정을 거쳐 자신들이 군인임을 깨닫고 몰려오는 적과 용감히 싸우는 내용이다. 이러한 선배 세대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지켜 질 수 있었고 우리의 오늘이 있었다.


“어머니, 저는 오늘 북한 괴뢰군을 죽였습니다. 제가 아는 북한군은 머리에 뿔이 달린 괴수였습니다. 근데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저희와 같은 어머니를 찾고 있었습니다.” (오장범의 독백)


영화 속에 보면 ‘학도병은 군인이다’라는 결단을 하기까지 인간적인 두려움과 나약함이 곧곧에서 보인다. 아직 부모 밑에서 어리광 부리고 있어야 할 이들의 천진함, 총을 쏘는 압박감,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한 공포,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등 평상시 같으면 결코 겪을수 없는 일들을 이들을 겪었고 그 과정을 통해 ‘나는 학도병이고 고로 나는 군인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어린나이의 학도병들은 이념, 사상 이런 것은 잘 모른다. 단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주변에서의 모습을 보고 지금 맞닥뜨린 상대가 적임을 직감했고 내 나라, 내 지역,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이들은 비록 희생 되었지만 이들과 같은 희생이 반복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학도병은 군인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고 형제였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 1950년 8월 10일 포항여중전투에서 이우근 학도병이 어머니께 쓴 편지 중 일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