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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영화로 읽는 통일코리아

영화 <지슬>(2012) - 세월이 흘러도 남아 있는 역사






영화 <지슬>


1945년 광복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와 미군정의 강압이 계기가 되어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 항쟁인 제주 4.3사건은 한국 현대의 아픔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주도 사람들 이외에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못했다. 2013년 오멸 감독은 4.3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독립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2>을 제작한다. 이 영화는 제주도에서 촬영하고, 제주도 출신 감독이 연출한 '지슬'은 그야말로 제주 영화다. 영화 속 마을주민들을 연기한 배우들은 제주도 방언을 있는 그대로 구사한다. 실제로 마을 주민을 연기했던 대부분의 배우들은 제주도 출신들이다. 그래서 한국 영화로는 아주 드물게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 자막이 나온다. ‘지슬’은 제주 4·3항쟁 속에서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민간인 희생자들의 비극을 소재로 했다.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를 뜻하는 ‘지슬’은 고난의 역사 한가운데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해안선 5 km 밖의 사람들은 폭도로 간주한다”


영화는 1948년 11월 15일 미군정의 제주도 소개령과 함께 시작한다. 소개령 이후 중산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이 벌어져 마을의 95%가 불에 타고, 주민 2만여명은 산으로 쫓겨가 본의 아니게 ‘산사람’이 되어버렸다. 제주섬의 북서부지역 중산간마을인 안덕면 동광리에도 토벌대 군인들이 들이닥쳐,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워버린다. 주민들은 토벌대의 공세를 피해 일단 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다.


“안 내려오면 다 죽인다고 합니다”


첫 번째 장의 이름은 영혼을 모셔 앉힌다는 ‘신위(神位)’, 폭도들을 토벌하기 위해 온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오고 마을 사람들은 군경의 진압을 피해서 동굴로 간다. 이 때, 한 가족의 어머니는 짐이 될 뿐이라며 놓고 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지슬(감자)를 가져가라고 하나, 아들은 화가 나서 내팽개치고 만다. 동굴로 숨어들기 전에 마을 사람들은 순덕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나, 곧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별 걱정을 하지 않는다. 동굴로 숨어들고 난 마을 사람들은 금방 원래 삶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돼지 밥 걱정이나 일상적인 수다를 떤다. 


두 번째 장의 이름은 ‘신묘(神廟)’,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다. 동굴로 숨어들 때, 마을 처녀 순덕이라는 여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순덕을 좋아하는 청년과 다른 청년보고 찾아보라고 한다. 하지만 순덕은 군인들에게 잡히고 끌려가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그러다 결국 순덕은 총을 빼앗아서 군인 몇 명을 죽이게 되고 끝내 사살 당한다. 순덕을 좋아하던 청년은 이 장면을 보게 되지만 차마 그녀가 죽었음을 알리지 못한다.


세 번째 장은 귀신이 남긴 음식을 먹어서 복을 받는다는 ‘음복(飮福)’이다. 첫장 ‘신위’에서 남겨진 어머니를 모시러 아들이 마을로 찾아간다. 하지만 마을에선 끔찍한 학살이 저질러졌었고, 그 노모마저 칼에 찔려서 살해당한다. 이 때 그 어머니와 살해한 군인 사이의 대화는 끔찍할 정도로 평범하다. 또한 이 때 마을로 돼지 밥 주러 간 아저씨는 돼지 훔쳐가는 군인을 공격하려다 오히려 돌에 맞아서 거의 죽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를 찾으러 갔던 아들은 어머니가 살해당한 것을 발견하고, 남겨진 지슬을 가지고 동굴로 돌아온다. 


이후, 네 번째 장인 지방을 태우며 염원을 드린다는 ‘소지(燒紙)’가 시작된다. 마을에 내려갔다 집잡힌 청년이 군인들을 데리고 동굴로 오게 되고, 동굴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매운 고추를 태워서 매운 연기를 내며 저항을 하지만 결국에는 거의 다 사살 당한다. 그리고 장의 제목 지방처럼 여러 시체들 옆에서 지방이 불타는 장면과, 4.3 사건에 대한 소개 자막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 <지슬>속 인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토벌로 하러 온 군인과 경찰을 피해 산속 ‘동굴’ 숨은 주민들과 주민들이 무슨 일을 했지도 모르고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르는 ‘토벌대’ 군인들이다. 영화는 제주 주민들과 토벌대에 대해 누가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지 않고 그저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개인들의 이야기에 초점 맞추고 그에 따른 감성을 담아냈다. 민간인이라면 무조건 총부터 쏘는 광란의 군인도 있고 상부의 지에 불만을 품고 이를 피하려는 군인의 모습도 있다. 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군인들이다.


또한 주민들도 저마다 다른 사연과 감정을 갖고 있다. 어두컴컴한 동굴에 숨은 주민들과 마을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학살을 벌이는 군인들을 잇는 매개체는 지슬이다. 생사가 걸린 위험에 처한 가운데서도 마을 주민들은 삶은 연명하게 해주는 지슬로 인해 행복해 한다. 지슬을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하지만 지슬은 슬픔이기도 한다. 마을에 남은 늙은 어머니는 토벌군인의 칼에 죽어가면서도 아들 내외에게 전해줄 지슬을 끌어안는다. 뒤늦게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한 아들은 눈물과 함께 지슬을 품에 안고 동굴로 돌아와 이웃들에게 지슬을 나누며 슬픔을 삭히기도 한다. 토벌하러 온 군인들 역시 지슬을 먹는다. '빨갱이를 한 명도 잡아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눈밭에서 벌거벗은 채 벌을 선 일병을 위해 동갑내기 이병은 남몰래 지슬을 건넨다. 군인들에게 겁탈 당한 마을처녀 순덕이를 위해 일병이 몰래 챙겨간 것도 지슬이었다. 처한 상항도 속해는 곳도 달랐지만 그들은 모두 지슬(감자)를 먹으며 자신들의 삶을 살아야했다.



희생당한 양민들


영화 <지슬> 해방 이후 한반도에 불어 닥친 이념갈등의 현장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러한 희생당한 양민들의 이야기는 한국전쟁 와중에도 발생한다. 가장 대대표적인 사건이 한반도 남한에서 벌어진 ‘거창양민학살사건’과 북한에서 벌어진 ‘신천양민학살사건’이다. 거창양민학살 사건의 발단은 1950년 12월 5일에 지리산 인근에 숨어있던 공산군 공비 5백명이 거창의 신원면 경찰지서를 습격한 것에서 거창 사건은 시작 된다. 이 일로 경찰관 10여 명이 희생되었고, 거기에 주둔했던 나머지 경찰관들이 지서 포기하고 인근 거창읍으로 달아난다. 


그 뒤 1951년 2월 8일 11사단 산하의 공비 토벌 전담 부대가 신원면을 수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공비와 내통하였다고 하여 2월 10일 내탄 마을 골짜기에서 청장년 136명을, 11일 박산 계곡에서 527명을 중화기로 무차별 학살했다. 이른바 ‘거창양민학살사건’이다. 이 사건을 진상 조사위한 노력은 유족들을 중심으로 전쟁 이후에 계속 시도 되었으나 정부는 언급 자체를 꺼렸고 1988년이 되어서야 위령비를 건립할 수 있었고 1996년 국회는 희생당한 거창 주민들의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다.


북한지역에 벌어진 신천사건은 1950년 10월 1일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시작된다. 국군이 곧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0월 13일 황해도 신천 지역에서 반공의거가 일어난다. 공산 치하에 숨어 살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반공청년들이 들고일어나 퇴각하는 인민군과 싸워 국군의 북진을 돕는다. 이때 309명의 반공청년이 전사했다. 5막에 걸쳐 진행된 신천사건의 제1막이다. 


제2막은 퇴각하던 인민군들이 태극기가 꽂혀 있는 신천을 진압하는 와중에 벌어진 학살 사건을 일컫는다. 


제3막은 공산 진영에 가족을 학살당한 의거군이 자치회로 개편된 공산당 간부들과 그 가족들을 처단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제4막은 인근 구월산으로 피해 들어간 인민군 패잔병과 남은 노동당원들이 빨치산을 조직해 다시 양민학살에 나서고, 이를 진압하려는 자치회와 또 한차례 충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대량 살상극이다. 


제5막은 후퇴했던 인민군이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신천을 재장악하면서 일어난 학살극이다. 구금되었던 공산당원과 그 가족들은 의거군에 처형되고, 미처 신천을 떠나지 못한 반공 인사들과 그 가족들이 다시 한번 빨치산들에게 학살당한다. 


다섯 번에 걸쳐 일어난 신천사건은 비공식적 집계로 3만 5천명이 죽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북한은 이 사건을 미군에 의한 대량 학살이라 대외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나 사실 미군이 공식적으로 북진 하던 중 신천에 머무른 시간은 공식적으로 단 두시간에 불과하다.


신천사건을 배경으로 소설가 황석영은 2001년 소설<손님>을 출간했다. 황석영 작가는 신천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기독교와 막스주의의 두 이데올로기의대립의 결과로 보고 있다. 황석영 작가의 시각을 빌리자면 “조선시대 이북지역 사람들은 각종 차별을 받아 비교적 개화사상을 빨리 받아 들였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접어 들어 지식인은 서로 상반된 길을 걷게되었는데 하나는 기독교를 통해서, 다른하나는 사회주의를 통한 개화의 길이다. 이들의 갈등은 토지개혁이 시작 되면서 대립이 본격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전쟁을 통해 대학살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념도 사상도 뭔지로 모르는 사람들이 그저 누구와 조금 가깝게 지내고 자신의 것을 나누며 인지상정(人之常情)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희생을 당해야 했다. 


영화 <지슬>속 지슬을 나누어 먹으로 각박한 세상을 일상의 웃음으로 풀어내려 했던 제주도 사람처럼 1950년 경남 거창 신원면 사람들과 황해도 신천 사람들 역시 소소한 일상 가운데 살다가 그런 아픔을 당했으리라. 이제 남은 것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 않았던 역사의 아픔을 화해를 통해 잘 치유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