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한과 소망의 세월
메모라이즈 | Memorize
태극기휘날리며 OST
수 많은 눈물과 아픔들이 서린 세월
바람도 구름도 갈 수 없는 회한의 고향
수 많은 고통과 슬픔으로 굳어진 산하
잊혀져 바래진 이름모를 내 형제들의 숨결
기억하나요 그 깊은 슬픔을
기억하나요 갈라진 대지에
당당히 흘러 넘치던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염원이
거룩한 기도의 강물이 되어
하나된 숨결과 하나된 믿음이
이 땅위에 가득히 넘쳐나는 그날을.
2005년 결성된 한국 최초의 혼성 팝페라 듀엣 ‘휴 HUE:’는 2003년에 개봉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OST에 가사를 입힌 노래 Memorize 발표한다. Memorize의 노래에는 분단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 우리민족의 회한과 소망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사실 <태극기 휘날리며> OST는 영화가 개봉 된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주변에 자주 들을 수 있는 곡이다.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으며 군인 관련 행사에도 이 노래를 자주 등장한다.
특히, 지난 2010년 천안함 침몰 당시 선체와 장병들의 사체를 인양 할 때 몇몇 방송사들은 이를 중계하며 배경으로 음악으로 <태극기 휘날리며> OST를 사용하기도 했다. 왜 10년 이상이 시간이 흘렀어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OST는 우리 곁에서 잊혀지지 않는 음악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 음악속에 담겨져 있는 영화의 스토리와 정서가 한국인의 그 무엇인가를 자극하고 움켜쥐고 있기 때문일 것 이다. 분단, 전쟁, 이념, 형제애, 갈등, 헤어짐, 그리움 등 1945년 이후 우리가 겪었던 회한의 일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싶다. 분명 <태극기 휘날리며>는 영화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을 우리에게 주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강제규 감독은 2001년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에 관한 KBS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게 된다. 다큐를 본 후 강 감독은 유독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장면은 50년 만에 찾은 남편의 유해 앞에서 흐느끼던 백발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강제규 감독은 이 장면을 모티브로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제작을 결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한국영화 1천만 관객 신화를 만든 <태극기 휘날리며>다. 강제규 감독은 영화의 기획과정에서 다양한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으며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저희 자문위원들은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영화 이다 보니 사실에 바탕하되 사실을 넘어서라고 주문했습니다. 사실에 너무 매몰 되어 무슨 다큐멘터리를 찍는게 아니니까요. 감독이나 작가의 관점에서 적절하게 해석 할 수 있는 해석의 여유를 가지라고 했지요” (박명림, 연세대 교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자문위원)
서울 종로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구두닦이를 하는 이진태(장동건)와 그가 아끼는 동생 이진석(원빈), 진태의 약혼녀 김영신(이은주)과 가족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밝고 활기찬 생활을 해 나간다. 전쟁 발발 하루 전날 이들은 함께 냇가에서 물장난을 치며 가족간의 정을 나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영신이 진태의 어머니에게)
어느 날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진태와 영신의 가족들은 피난 행렬을 따라 대구까지 내려간다. 그러나 대구역사에서 만 18세의 진석이 강제로 징집되어 군용열차에 오르자, 진태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군용열차에 오르지만 진태 역시 징집되고 만다. 두 형제는 징집과 동시에 낙동강방어선전투에 투입된다.
“너만 보낼 수 있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적진에 들어가 자폭이라도 할꺼야” (진태가 진석에게)
진태는 무공훈장을 받으면 동생을 제대시킬 수 있다는 대대장의 말을 듣고 오로지 동생을 위해 전쟁영웅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갈수록 전쟁의 광기에 휘말리는 진태와 그런 형의 모습을 바라보는 진석 사이에 갈등과 증오가 싹트기 시작한다. 이후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국군에게 죽음을 당하고, 진석 역시 국군에게 죽음을 당한 것으로 오해한 진태는 인민군 부대장이 되어 국군의 적이 된다. 뒤에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형이 인민군이 되었다는 사실을 안 진석은 제대를 하루 앞둔 날, 형을 구하기 위해 전선으로 나가 우여곡절 끝에 형을 만나지만, 진태는 끝내 죽음을 맞고 5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유골로 돌아온다.
“돌아와서 구두 완성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돌아온다고 약속했잖아요. 왜 이러고 있어요. 뭐라고, 말 좀 해요. 50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이 동생한테 뭐라고 말 좀 해요. 그 때 형 혼자 두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형.. 형..” (노인이 된 진석이 진태의 유골을 보고)
전쟁의 아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경이 되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은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분단에 대한 걱정 보다는 단지 일본이 패망하고 독립된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 줄 몰랐고, 미국과 소련은 한민족이 주체가 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기 전 잠시 이 땅에 주둔하며 일본의 잔재를 청산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달랐고 좌익과 우익, 친일파와 독립 운동가들의 생각이 달랐다. 순진한 백성들은 좌익이냐 우익이냐 노선을 확실할 것을 요구 받았으며, 이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선동적인 정치문구를 접하기 시작했다. 좌우익의 대립이 극해지자 곳곳에서 테러와 파업, 동맹휴업,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북한에서는 인민이 주인이 되는 ‘인민공화국’을 세운다는 목적으로 지주들의 땅과 재산이 몰수 되었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된 이후 양측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북한의 김일성은 전쟁을 수행할 ‘인민군’을 창설하고 탱크와 같은 무기를 소련으로부터 지원 받아 군사력을 강화 시켰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한다.
“우리 국민들은 유언비어에 흔들림 없이 생업에 종사하시기 바랍니다” (영화속 전쟁 발발직후 가두방송)
전쟁이 발발 했을때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38선 부근에서의 교전쯤으로 생각했다. 전쟁 초반 절대적인 열세에 놓였던 남한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3개월 만에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를 점령하였다.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이 합동으로 실시한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 때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압록강까지 도달함으로써 통일이 곧 달성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0월 하순경부터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다시 38선 부근으로 내려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2년여간의 휴전 회담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오랜시간이 아직도 전쟁의 아픔은 곳곳에 남아있다. 통일 되지 못하고 갈라진 국토, 가족과 뜻하지 않게 헤어진 이산가족들, 세계 최대의 화력과 병력이 밀집되어 있는 휴전선 155마일,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싸고 여전히 미묘한 갈등이 상존하는 국제질서, 3면이 바다에다 북쪽은 철책으로 가로 막혀 섬 아닌 섬이 되어 버린 대한민국의 생각과 공간적인 제약. 이 모든 것이 한국전쟁의 결과물들이다.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인적, 물적 피해도 주었지만, 정신적으로 상대에 대한 깊은 불신과 적대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심리적 변화는 분단을 고착화 시켰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보이는 한국전쟁은 멈추었지만, 보이지 않는 한국전쟁은 아직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준 교훈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이진석, 이진태 두 형제가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장소는 ‘두밀령’이다. 두밀령은 남과 북에는 격전의 장이었지만 형제에게는 화해와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는 장소였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관객 600만명을 넘어설 무렵 인터넷을 중심으로 영화 속 뜨거운 형제애가 담기 장소인 ‘두밀령’에 기념비를 세우자는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두밀령. 정확히 말하자면 최전방인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 있는 능선이다. 휴전선에 인접해 있고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빤치볼 고지’, ‘피의 능선’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사실 두밀령에 전쟁은 있었지만 이진태와 이진석은 없었다. 그건 단지 영화속 가상의 스토리였을 뿐이다. 그리고 기념비 건립을 위해 서명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 두밀령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전쟁을 격어 보지 않았던 세대들에게 영화 속 두밀령 이야기는 남북 분단과 전쟁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 공간으로 다시 창조 되었다. 일방적인 정보 전달 위주의 통일교육을 받았을 때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영화 한편을 통해 분단과 통일에 대해 생각해 보고 뭔가 해보고 싶은 ‘영감(靈鑑)’을 얻었다. 이것이 ‘태극기 휘날리며’가 만든 변화의 힘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처럼 전쟁이란 극한 상황을 통해 ‘형제애’ 나아가 ‘가족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진태는 진석을 위한 뒷바라지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영신’과 그녀의 동생들을 포함한 사랑 가득한 가족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가족들이 품고 있었던 소박한 작은 행복은 가혹한 냉전과 분단의 현실 앞에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영신이 했던 그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해석 될 수 있다. 전쟁 이후 우리가 이루어 놓은 가치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발전시키도록 하는 노력으로 말이다.
“형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따 눈 뜨면 우리 집 안방이고 난 아침 먹으면서 형한테 얘기할거야..” (진석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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