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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영화로 읽는 통일코리아

영화 <쉬리>(1999) - 분단 영화의 새로운 한 페이지





강제규 감독은 1998년 영화 <쉬리> 제작 작업에 돌입한다. 수많은 기획회의와 시나리오 집필 과정을 통해 탄생한 <쉬리>는 멜로 라인과 액션 라인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었다. 10억 원 안팎으로 영화를 제작하던 당시, 30억 원의 제작비와 80회의 촬영회차는 실로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영화 <쉬리> 개봉과 함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타이타닉>(1997)의 한국 관객수를 돌파하며,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록인 6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를 두고 언론은 쉬리가 타이타닉을 침몰 시켰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쉬리’를 계기로 한국 영화계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영화 <쉬리>


영화 <쉬리>가 개봉된 1999년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이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다. 1998년 가을에는 금강산관광이 이루어졌고 1999년초에도 각종 대북지원 및 남북교류에 대한 논의들이 진행 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쉬리의 개봉은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불려 일으켰다. 영화 <쉬리>는 북한 특수8군단의 혹독한 훈련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한국 정보기관에게 요주의 인물인 특수 8군단 요원인 이방희의 잔인한 활동 내역이 화면에 나타난다. 이방희의 추적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 일급 비밀정보기관 O.P의 특수비밀요원 유중원(한석규)과 그의 동료 이장길(송강호)이다. 남북 관계가 한창 화해 무드로 가고 있던 어느날 무기밀매상 보스 임봉주가 유중원과 이장길에게 뭔가 중요한 제보를 제공하려고 이동하던 중 무참히 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중원은 직감적으로 특수 8군단 소속 최고의 저격수 이방희의 다시 나타났음을 감지한다.


유중원과 이장길은 죽은 임봉주의 배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방희가 임봉주를 통해 국방과 학기술연구소에서 개발한 신소재 액체폭탄 CTX 를 확보하려 했다는 것을 알아낸다. 곧바로 연구소로 향하지만 이미 이방희는 한발 앞서서 담당 연구원을 살해한 뒤였다. 한편, 북에서 침투한 박무영(최민식)과 특수 8군단의 정예요원은 군단사령부로 이송중이던 액체폭탄 CTX를 탈취 하는데 성공한다. 유중원은 탈취범이 10여년전 리비아 비행기 피랍 사건 진압시 자신과 대결을 벌였던 그 박무영임을 알게된다. O.P의 주요 정보들 이 외부로 은밀히 유출되고 있음이 포착 되고 O.P 내에 첩자가 있다는 의혹에 휩싸이고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된다.


유중원은 그동안 명현에게 자신이 정보요원인 것을 감추고 살았다. 이명현에게 여행 약속을 남기고 이방희의 행적을 뒤쫓는다. 그리고 고국장(윤주상)과 이장길에게까지 거짓 정보를 흘리며 독자적인 작전을 개시하게 된다. 한편 이때 남북 친선 축구대회에 참관을 위해 북의 최고지도자가 남한에 오고 박무영과 특수8군단 대원들은 북한 강경파의 시나리오에 따라 탈취한 CTX를 축구장에 설치하여 남북의 지도자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애인 이명현에게 수상한 점을 느낀 유중원은 이명현이 성형 수술을 한 이방희라는 것을 알게된다. 동료인 이장길 역시 이명현의 수족관을 통해 들어온 어항속 금붕어 도청 장치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잠적한 이방희가 이명현 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장길은 이명현의 수족관을 찾아 갔다가 박무영의 총에 맞는다. 한발 뒤에 수족관을 찾은 유중원은 이장길이 손에 쥔 남북축구경기표를 보고 암살 음모가 있을 것이라 직감을 하고 축구장으로 향한다. 이윽고 축구경기장 변전실에서 유중원은 박무영과 그의 부하들과 맞닥 들인다.



유중원 : 착각하지마 박무영. 통일을 원하는 것은 니들만이 아니야. 아직은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 할때야


박무영 :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니들이 한가롭게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그 순간에도 우리 북녘의 인민들은 못 먹고 병들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어....새파란 우리 인민의 아들 딸들이 국경넘어 매춘부굴에서 단돈 100달러 팔리고 있어. 굶어죽는 지 새끼의 인육 마저 뜯어 먹는 그 애미 그 애비를 너는 본적이 있어? 썩은 치즈에 콜라 햄버거를 먹고 자란 니들이 알 리가 없지. 축구로 남북한이 하나가 되자고? 개수작 떨지 마라. 지난 50년동안 속고 기다린 것으로 족해. 이제 조선의 새 역사는 우리가 다시 연다.



경기장에 켜 놓은 라이터의 열기에 CTX가 가열되어 폭발이 가까워 왔을때 변전실 직원이 라이터를 끄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곧이어 북한 8군단 대원들과 O.P대원들간에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된다. 박무영을 비롯한 8군단 대원들은 사살되고 라이트 전원이 꺼지며 CTX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 간다. CTX 폭발이 실패하자 이방희는 남북 정상 암살을 위해 움직지만 결국 O.P대원에게 포위된다. 이 과정에서 유중원과 이방희는 서로에게 총구를 향고 끝내 유중원은 이방희에게 총을 발사한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시간이 흐른 후 유중원은 이방희가 도용했던 원래의 이명현을 다시 찾아 제주도로 간다. 그리고 이명현 아니 이방희가 좋아하던 노래를 같이 듣는다.



아름다운 외모의 북한 공작원


영화 <쉬리>속 북한 공작원인 이명현의 미모는 아름답다. 간첩, 공작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흉측하고 포악함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명현의 세련된 이미지는 관객들로 하여금 뭔가 안타깝게 만들고 웬지모를 애틋함을 자아내게 한다. 흔히 미인을 이용하여 사람을 꾀는 전략을 미인계(美人計)라고 한다. 역사상 보면 수 많은 미인계 전략이 있어 왔고 그 미인계를 통해 세상의 역사가 바뀐 경우도 많다. 오죽하면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3mm만 짧았다면 지구의 얼굴은 변했을 것’이라고 했겠는가?


남북관계에서도 외모는 상대방의 관심을 불러 모으는 코드로 활용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왔던 북한 미녀 응원단이 그러하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누가 금메달을 땄는지는 기억은 못해도 미녀 응원단이 와서 나름 관심을 끌었던 것은 대부분 기억한다. 당시 북한은 응원단이라는 일종의 미인계를 통해 한국의 대중심리에 접근을 한 셈이다.






그리고 사람의 외모는 전혀 의도하지 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발 사건이다. 1987년 11월29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707기가 미얀마 근해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발음과 함께 사라졌다. 기내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해외근로자 93명과 외국인 승객 2명, 그리고 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고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사건발생 이틀 만인 12월1일 사고비행기에 일본 국적의 요주의 인물 두 명이 탑승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제의 두 일본인은 일본여권을 위조한 북한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로 이들은 비행기에 시한폭탄을 설치한 후 중간기착지인 아부다비에서 내려 탈출 경로를 따라 이동 중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도주하려던 김승일은 바레인 공항에서 위조여권이 적발돼 체포되기 직전 독약이 든 캡슐을 깨물고 현장에서 자살했다. 김현희 또한 음독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현지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만다. 그리고 김현희는 서울로 압송 되었으며 1988년 1월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지령을 받고 88올림픽을 방해하고 남한 내 계급투쟁을 촉발할 목적으로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지회견에 나온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전의 북한 간첩을 대하는 그것과 좀 달랐다. 당시 25살이었던 김현희의 외모가 연예인 못지 않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김현희를 보면 탤런트 유지인씨의 젊은 시절이 연상된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북한의 엘리트 집안 출신에 평양외국어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재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꽃다운 20대 여성을 테러 공작원으로 만드는 북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일각에서는 김현희에 대한 동정론도 일었다. 또한 김현희의 옷 차람과 말투는 이내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했으며 코미디 소재로 활용되기도 하고 김현희를 다룬 영화가 제작 되기도 했다. 심지어 김현희와 결혼하게 해주면 그를 잘 보살펴 좋은 길로 인도하겠다는 민원 아니 민원도 접수 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사회가 북한 간첩이나 공작원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진것은 없었다. 그것도 비판이나 부정적인 것이 아닌 동정이나 우호적으로 말이다. 아마도 김현희가 젊고 아름다웠기에 가능했을 듯 싶다.


김현희는 대한항공기 폭발 사건발생 3년 만인 1990년 3월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판결 보름만에 특사로 풀려났다. 북한의 날조 주장을 반박할 유일한 생존자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 1997년 국정원 직원과 결혼해 가정을 꾸려 삶을 이어가고 있다. 만약에 당시 김현희가 여성이 아니고 남자였다면 그리고 외모가 출중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국민들의 관심의 정도는 달랐을 것이고 체포된 테러공작원에 대한 처우도 김현희가 받았던 것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김현희는 그동안 <사랑을 느낄 때면 눈물을 흘릅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등의 책을 출간하며 대한한공기 폭파 사건 이전과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 했다. 책의 제목들 처럼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의 굴레를 벗고 한명의 여성으로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소소하게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영화 <쉬리> 속 북한 공작원 이명현 아니 이방희가 국정원 요원 유중원을 사랑하며 잠시나마 품었던 그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원씨 내 앞에 나타나지마. 중원씨와 같이 있었던 지난 1년. 그게 내 삶의 전부야. 그 순간 만큼은 이명현도 이방희도 아닌 그냥 나였어” (이명현이 유중원에게 보낸 마지막 음성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