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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영화로 읽는 통일코리아

영화 <태백산맥>(1994)과 <남부군>(1990)




1987년 6월의 뜨거운 외침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한국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다양한 이야기와 논의를 할 수 있는 합법적 공간이 넓어졌다. 그리고 6월 민주항쟁은 우리에게 한층 진일보된 표현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금지된 노래의 ‘해금(解禁)’이다. 1970년대 가수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까지만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부를 수 없는 금지곡이었다. 이는 새로운 것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외침이었다.


아울러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대학생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 빨치산 활동에 대한 각종 문학적 기술(記述)을 읽는 열풍이 일어난다. 프랑스어로 ‘동지’ 또는 ‘당파’라는 뜻의 ‘parti(파르티)’에서 유래한 말로 일정한 조직체계에 의하지 않는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이다. 흔히 우리 사회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직전과 직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공산 유격대를 말한다.


“문학계에 ‘빨치산 문학’이라는 새로운 범주가 자리 잡고 있고 이를 통해 분단을 딛는 하나의 분수령이 될것이다.” (한겨레신문 1989년 1월 24일)


1970년대 이병주의 장편소설 <지리산>으로 시작된 빨치산 문학은 1980년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으로 본격화 되었고 1988년 이태의 수기 <남부군>이 출간 되면서 대중적인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반공체제아래 묻어 두었던 해방 이후 이념 갈등과 빨치산 활동에 대한 금기를 헐어 낸 이러한 작품들은 독자들의 호기심에 편승해 큰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1980년대 이전 분단 문학은 대부분 6.25 한국전쟁이라는 소재에 치우쳐 있었고 형제간에 총을 겨누어야 하는 전쟁의 비극과 상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또한 엄격한 당국의 감시속에서 이념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은 ‘반공’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타야하는 암묵적인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분단문학에 익숙했던 독자들에게 빨치산 문학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움을 주었다. 물론 역사해석 오도, 빨치산 투쟁 일변도, 감상주의 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게 하고 분단의 실상을 파악했으며 분단문학에서 통일지향 문학으로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빨치산 문학의 인기에 힘입어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이태의 <남부군>은 영화로도 제작이 된다.







영화 <태백산맥>


태백산맥은 1983년~1989년까지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된 조정래의 대하장편소설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 제2부는 1948년 여수, 순천에서의 반란이 실패하고 그로 인해 입산하게 된 배경과, 빨치산의 유격전과 군경의 토벌 작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제3부는 1950년 6ㆍ25 전쟁의 발발과 빨치산의 하산, 미군의 참전과 빨치산의 재입산, 그리고 좌ㆍ우익의 극한 투쟁을 다루고 있다. 제4부는 휴전 협정의 조인을 다루고 있으며 투쟁의 방향을 '역사투쟁'으로 바꾼 후, 중심 인물인 전남 보성지역 좌익의 리더 염상진의 죽음으로 이 소설이 마무리 된다. 좌익 빨치산 계열, 토벌군, 우익 청년계열, 중도지식인 그룹 등으로 이룬어진 인물군들은 바로 당대 현실을 대변하는 캐릭터들이다. 이 소설은 여순사건 이후부터 농지 개혁에 대한 저항, 그리고 6.25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분단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 태백산맥은 소설의 1,2부를 바탕으로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 진다. 해방 후 극심한 좌우 이념대결 절정에 달하던 1948년 10월 19일, 여순 반란 사건이 일어난다. 남로당 전라남도 보성군 당 위원장인 염상진(김명곤)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은 벌교를 장악한 후 인민재판을 열어 반동분자를 숙청한다. 그러나 토벌군에 의해 반란군이 패퇴하면서 좌익세력은 순천의 조계산으로 후퇴하고 벌교로 다시 들어온 우익세력은 좌익 연루자와 그 가족들을 연행하여 조사한다. 이때 우익 청년조직인 대동청년단 감찰부장인 염상구(김갑수)는 형 염상진에 대한 증오심으로 빨치산의 아내를 겁탈하는 등 좌익 가족에 대한 보복 테러를 가한다.


순천중학 교사이며 민족주의자인 김범우(안성기)는 벌교 내에서 벌어진 좌익의 잔인한 반동숙청과 우익의 과도한 보복 등 양쪽을 비판하고 막아보려다 오히려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게 된다. 한편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심재모(최동준)가 이끄는 계엄군이 벌교에 들어선다. 심재모는 지역내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김범우를 찾아가 지역의 현안에 대해 이야기 한다.


심재모 (토벌대장) : 대체 이 벌교란 어떤 곳입니까? 어째서 그렇게 좌익이 많이 나왔고, 좌우익 갈등이 심했는지요?


김범우 (민족주의자) : 벌교에서의 좌우익 갈등은 땅에서 시작되었고 땅으로 규결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심재모 : 땅이라구요? 조금 뜻밖이군요?


김범우 : 이 땅의 문제는 일제 침략에서부터 설명 되어야합니다. 한반도 식민지화에 착수한 일본이 제일 먼저 한 것은 8년간의 토지 조사를 벌여 농민들의 땅을 약탈 하였는데 그 결과 농민의 8할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그들의 8할이 극심한 굶주림에 허덕여야 하는 전략 농가가 된것이 식민지의 현실이죠. 그 와중에도 많은 지주들은 일본인들과 협조하여 땅을 사들여 대지주가 되었는데 이른바 친일지주입니다. 그들은 일본인 지주들과 함께 농민을 착취하며 식민 정치에 적극 협조했습니다. 농민들은 수확량의 7할 이상을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현실속에서 춘근기, 추근기의 악순환에 시달려야 했는데 그런 비참이 집중 된 곳이 땅이 너른 삼남 지방이었고 그중에서도 심한 곳이 바로 전라도 지방이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해방이 되었지요. 그런데 미소에 의해 점령된 남북지역에 중요한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이북이 무상 몰수 무상 분배의 토지 개혁을 단행한데 반하여 이남에서는 자기 재산을 앉아서 뺏길수 없다는 지주들의 강한 반발 속에서 농지 개혁은 자꾸 미뤄지고 그에 따른 작인들의 실망과 분노가 커지면서 지주와 소작간에 땅을 둘러싼 갈등이 심해지자 그 갈등의 틈을 좌익이 파고 들었지요. 그들이 주장하는 무상 몰수 무상 분배는 자기 땅을 갖고 싶어 하는 소작들의 열망과 잘 맞아 떨어지고 그 결과 많은 소작들은 사상이 뭔지도 모른 채 좌익에 동조하거나 가담하게 된 겁니다. 여순때 많은 소작들이 입산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한편 보성지역 좌익계열의 대장인 염상진은 좌익의 수중에 들어간 보성군 율어면에서 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이는 주민들의 높은 호응을 얻지만 심재모의 기습작전으로 빨치산들은 다시 산으로 쫓긴다. 산자락 마을을 가운데 두고 벌이는 심재모와 염상진의 싸움은 점점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김범우는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희생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전쟁을 예감한다. 1949년 겨울부터 시작된 군경이 합세한 동계 대토벌 작전으로 빨치산 세력의 90%가 토벌되고 남아 있던 세력들이 혹독한 굶주림과 절망 속에 허덕이고 있을 때 6·25 전쟁이 터진다. 염상진을 비롯한 빨치산들은 북한 인민군과 함께 다시 벌교에 진입했으나 자신들의 기존 조직과 투쟁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인민군과 갈등이 일어난다. 1950년 9월 UN군과 국군이 대반격을 하면서 다시 벌교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영화 <남부군>


소설 태백산맥의 후반부는 빨치산의 산중 작전을 다루 있지만 영화 <태백산맥>은 인천상륙작전이후 북한 정규군이 철수 하며 끝을 맺는다.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이야기는 영화 태백산맥 보다 4년 먼저 개봉한 영화 <남부군>에 잘 나타나 있다. 남부군은 6.25 당시 합동통신 기자였던 이태(1922~1997)의 자전적 소설이다. 6.25전쟁전 서울에서 합동통신 기자로 일했던 이태는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북한 조선통신 기자가 되었으며 1950년 9월, 순창 엽운산에 빨치산으로 입산, 남부군에 가담하여 실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1952년 3월에 토벌대에 체포되었다. 체포후 전향하여 1963년 민중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 후 1970년대까지 야당 정치인 생활을 했다. 그가 경험한 빨치산을 소설화 한 <남부군>은 1988년 출간과 함께 큰 화제를 모았고 1990년 정지영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된다.


영화는 1950년 9월 연합군에 의한 인천상륙작전 직후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조선중앙통신사 종군기자 이태(안성기)는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온 인민군의 패전으로 북한 인민군 유격대에 합류한다. 전세의 변화에 따라 남부군은 부대를 개편하고 이태는 신문 편집과 전사 기록의 책임을 맡아 빨치산의 활동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얼마 후 휴전 회담 소식과 함께 빨치산은 이제 북으로의 귀환과 북으로 부터의 환영을 기대하며 설레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남한 토벌대에게 쫓기고 북쪽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되는 고된 여정의 시작이었다. 토벌대에 추격당하면서 부상당한 이태는 자신을 간호해 주던 박민자(최진실)와 사랑에 빠지지만 본대 복귀 명령을 받고 헤어진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이태의 소대는 악담봉 전투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시인 김영(최민수)을 만나 그들은 동족 간 전쟁의 허무함을 토로한다. 이 전쟁에서는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승리는 없고 우리가 외세의 힘으로 해방되었고, 외세로 인해 분단되었으며, 외세가 개입한 전쟁을 하고 있기에 어디가 이기든 그것은 남과 북이 아니라, 미국이나 소련의 승리일 따름이라고 탄식한다.


토벌대에 쫒기던 이태를 비롯한 빨치산들은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이태는 남부군에 합류하고 정치부 소속의 정식당원이 된다. 휴전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대원들의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고, 남부군은 추위와 굶주림, 쇠진해진 사기로 궁지에 몰린다. 마침내 최후의 발악 같은 전투가 벌어지고 대열에서 낙오된 이태는 토벌군의 포로가 되면서 기나긴 빨치산 생활을 마감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이태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글로 표현한다.


“1952년 3월 9일 나는 시천면 외공마을에서 토벌군에게 체포 되었다. 16개월 후 휴전협정에 체결 되었다. 협정조인서에는 양측 후방에 남겨진 장비의 철거, 심지어 전사자의 발굴 및 반출에 관한 조문은 있었지만 남쪽 산악 지대에서 절망속에 헤매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들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다.”


이는 지리산에 갇힌 남부군이 남한의 토벌대에 쫓기면서 결국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비극적 운명을 나타내고 있다. 영화 <남부군>은 지리산 빨치산 활동과 왜 남과 북이 갈라서고 왜 동족끼리 죽이고 죽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으며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인 빨치산의 활동상과 처지를 객관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시각으로 그린 영화로 평가 받고 있다. 이와 반대로 지식인의 관점에서 그려졌고 빨치산이 지나치게 개인적으로 재현했다는 비판도 있다. 1990년 경향신문 7월 13일자에는 영화 <남부군>이 빨치산이 저지른 만행과 죄악상은 접어둔채 지나치게 인간적인 모습만 보여 줬다는 비판적인 기사도 실렸다.


여러 가지 관점과 해석이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해방 이후 우리는 좌우익의 갈등을 겪었고 전쟁을 경험했으며 자신이 원했던 그렇지 않았던 간에 지리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을 남과 북 모두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







무엇보다 상대에게 ‘관용(tolerance)’을


영화 <태백산맥>의 원작인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총 700만 부 이상 팔렸으며 1980~90년대 민족 문제를 고민하던 대학생들에게는 일종의 필독서였다. 하지만 보수적인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소설 <태백산맥>을 이적성이 짖은 불온서적으로 취급 했다. 그렇다고 보수적인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을 외면한 것은 아니다. 2008년 11월 21일. 소설 <태백산맥>을 뜻을 기리고자 소설의 주요무대인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이 개관했다. 이 자리에는 한국 보수층의 원로이자 민정당 최고위원을 지낸 박태준(1927~2011) 전(前) 포항제철 회장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박태준 회장의 등장에 의아해 했다.


‘박태준과 조정래’.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두 사람은 살아온 길이 너무나 다르다. 한 사람은 ‘보수’로 한 사람은 ‘진보’로 각인 되어 있다. 그래서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람들 역시 다르다. 조정래를 ‘민족작가’라 부르며 호감을 보이는 사람들은 박태준을 ‘개발독재의 주역’이라 칭하며 거부감을 나타내고, 박태준을 경제기적을 이룬 ‘산업화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사람들은 조정래를 ‘빨갱이 작가’라 매도한다.


극단의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두 사람은 1996년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성장과 발전을 다룬 대하소설 <한강>의 집필 과정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배경이 달랐던 두 사람은 상대방이 걸어온 길의 진정성에 매료 되었고 서로를 세워주고 보듬어 주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보수층의 원로 박태준 회장은 조정래 작가가 소설 <태백산맥>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당하는 과정에서 조 작가의 진정성을 알리며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다. 또한 조정래 작가는 철강왕 박태준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그린 전기를 직접 집필하며 박 회장의 업적을 인정하며 알리게 된다. 서로를 이해하고 허물을 들추어 내지 않고 품어주는 마음. 한국 사회의 큰 어른 박태준 회장과 조정래 작가에게는 살아온 배경이 다른 상대방을 포용하는 그 마음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배려의 마음을 '관용(Tolerance)' 이라 부른다. ‘개발독재의 주역’과 ‘빨갱이 작가’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에서 마음을 나누며 ‘관용(Tolerance)’을 실천하고 있었다.


현대 사회의 핵심적인 가치인 개방성과 다양성 근원에는 상대방에 대한 ‘관용(Tolerance)’이 있다. 즉 나의 절대성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21세기 세계화 시대, 통일을 지향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 역시 ‘관용’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향하는데 대한 다양한 담론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분위기는 아직 부족한 면이 많다.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20세기 이념의 잣대를 기준으로 자신의 생각과 조금 이라도 다르면 ‘빨갱이’가 되고 ‘수구꼴통’으로 재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관용’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故박태준 회장과 조정래 작가의 아름다운 관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