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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1987년 6월의 함성





박정희 대통령 시해 후 불었던 민주화의 바람 ‘서울의 봄’은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그 막을 내렸다. 그 후 얼마간 민주화에 대한 이야기는 지하로 숨어 들어야했다. 주요 야당 정치인들은 정치 활동이 규제되었고 대학가에는 경찰이 상주해 학생들의 동태를 살폈다. 군사독재에 저항해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기존의 정치적 민주화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중심축을 이루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80년 5월 광주의 아픔을 보며 자유주의적 틀을 넘어서 보다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려는 급진적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미국에 반대하는 반미운동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생산자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진보적 민주화운동, 좌파 민주화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소위 ‘주사파’라 불리는 ‘민족해방계열’ 역시 이때 등장한다. 이들은 북한의 김일성 독재를 추종하며 비타협적인 반독재투쟁을 주도한 급진적 운동세력이었다.


한국현대사의 한 획을 그었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한 학생의 고문에 의한 죽음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 21살의 서울대 학생 박종철 군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진상결과 고문치사로 밝혀지자 1월 29일 함석헌, 김영삼, 김대중 같은 민주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후 많은 시민들이 박종철 군 추모행사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6월 민주항쟁의 분위기는 이렇게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전두환 독재정권에 분노했고 들끓기 시작한 여론은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5월 27일 야당인 통일민주당을 비롯한 민주화를 염원하는 광범위한 민주세력이 결집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탄생했다. 이들은 6월 10일 여당인 민정당의 대통령후보선출 전당대회에 맞추어 ‘박종철 군 고문살인조작 범국민규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군이 시위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이 되는 발생한다. 시민들은 다시 분노했고 거리로 몰려 나왔다. 6월 10일 여당인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같은 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22개 도시에서는 24만 명의 시민들이 박종철 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정권을 규탄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독재 타도’를 외쳤다. 이후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위는 6월 28일까지 전국 30여개 도시에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결국 6월 29일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는 대통령직선제 수용,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사범 석방 등 국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일명 6․29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