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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냉전의 시대



1950년 6월. 바로 그 시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즐기는 스포츠 종목은 단연 축구이다. 규칙이 단순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키가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이나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다. 공과 발이 지닌 원초적인 불안전성으로 인한 팽팽한 긴장과 승리에 대한 희망을 심어준다. 그래서 축구는 나라, 민족, 이념, 종교를 뛰어 넘는 스포츠로 각광받고 있다. 1930년부터 4년에 한번 열리는 FIFA 월드컵은 지구촌 최대의 축구 축제이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해 1942년과 1946년에는 아쉽게도 월드컵이 개최되지 못했다.


1950년 6월 24일 오후 3시, 지구촌 남반부 브라질에서는 1938년 프랑스 대회 이후 12년 만에 FIFA 월드컵 축구대회의 개막식이 열렸다. 개막 첫 경기 상대는 브라질과 멕시코였다. 전 세계의 축구 팬들이 눈과 귀가 월드컵이 열리는 브라질을 향해 있었던 바로 그 시각, 지구 정반대에 위치한 한반도에서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브라질의 6월 24일 오후 3시는 한반도의 6월 25일 새벽 3시에 해당된다.


브라질 월드컵 개막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한반도에는 남북이 대치한 위도 38도선 전역에서 소련의 지원으로 중무장한 북한군 20만 명이 경계선을 뚫고 남침하기 시작했다. 3년 1개월 동안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남북한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1945년 영토 분단, 1948년 정치 분단에 이어 마음의 분단, 사람의 분단이 더욱 고착화 되었다. 한쪽에서는 지구촌 화합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지만, 반대편의 다른 한쪽에서는 갈등, 분열, 대결, 고통, 희생, 상처, 아픔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냉전’과 ‘열전’ 사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5년 전인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을 맺음과 동시에 연합국의 일원인 미국과 소련 사이의 동지적 관계도 막을 내려야 했다. 전쟁 중에는 독일-일본-이탈리아 동맹이라는 공동의 적을 갖고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이들에게는 더 이상 같은 목표가 없었다. 그리고 이들이 각각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사회주의와 계획경제 사이에는 대립각만 세울 뿐 협력하기에는 넘어야 산들이 너무 많았다.


전쟁 이후,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은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1946년 영국 수상 처칠은 유명한 연설 ‘철의 장막(Iron curtain)’으로 두 진영의 불협화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신의 벽은 높아만 갔고 원자폭탄 개발, 독일 점령 문제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이때 등장한 단어가 바로 차가운 전쟁 곧 ‘냉전(The Cold War)’ 이다. 지금까지 애용 되는 ‘냉전’이란 의미는 미국과 소련이 주축이 되어 두 진영으로 분열된 ‘힘의 양극화’, ‘군사 블록화’를 뜻한다.


유럽에서 벌어진 냉전 상황은 직접적인 무력충돌을 의미하는 ‘열전(hot war)’의 단계까지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극동 아시아에 위치한 한반도는 달랐다. 한반도는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열전(hot war)’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정작 한반도에 있는 사람들은 잘 알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전쟁을 향해 말이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이자 패전국가인 독일이 ‘냉전의 중심’이었다면 일제 식민지에서 갓 해방된 한반도는 ‘냉전의 교차점’이자 ‘열전의 발화점’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해방과 함께 위도 38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에 분할 점령된다. 1945년 8월 12일, 스탈린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미군보다 먼저 한반도에 들어간다. 미국은 1945년 초부터 소련에게 일본을 공격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내부 사정으로 즉각적인 공격을 미루다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여되고 3일 후인 8월 9일 나가사끼에 또 다른 원폭이 투여되자 당일 자정을 기해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초 미국은 일본의 패망에 수개월의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소련이 파죽지세로 만주군을 격파하고 한반도로 남하하고, 자신들은 9월은 되어야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는 상황에 처하자 위도 38도선을 중심으로 군사적 분할 점령을 제안했던 것이다.


소련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남북 분단은 시작되었다. 만일 이러한 분할 점령 제안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동유럽 국가처럼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련군의 일부는 미국과 약속한 38선 이남인 춘천까지 내려와 무력시위를 하며 행정권 이양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민족의 분단은 우리에게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적 구조이자 산물이 되어 버렸다.






바라던 ‘해방’이 되었지만


일제식민치하에서 갓 해방된 우리는 ‘분단’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고, 준비는 더더욱 하지 못했다. 단지 일본이 패망하고 독립된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 줄 몰랐고, 미국과 소련은 한민족이 주체가 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기 전 잠시 이 땅에 주둔하며 일본의 잔재를 청산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틀렸고 좌익과 우익, 친일파와 독립 운동가들의 생각이 달랐다. 순진한 백성들은 좌익이냐 우익이냐 노선을 확실할 것을 요구 받았으며, 이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선동적인 정치문구를 접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중국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의 귀국이 아닌 개인자격의 귀국이었다.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신탁통치 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라 안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데모의 분위기로 휩싸였다. 좌우익의 대립이 극해지자 곳곳에서 테러와 파업, 동맹휴업,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송진우, 백관수, 여운형, 김구와 같은 지도자들이 암살 되었다.


북한에서는 인민이 주인이 되는 ‘인민공화국’을 세운다는 목적으로 지주들의 땅과 재산이 몰수 되었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와중에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하여 분단이 아닌 단독정부 수립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에게는 남북 분단의 현상 유지에 대한 의지만 있었을 뿐 우리 민족이 그렇게 바라던 단독정부 수립을 통한 통일에 대한 의지는 없어 보였다.


결국 남과 북은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절차에 들어간다. 1945년 10월, 북한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지며 김일성이 책임비서가 되어 소련 군정에 참여하게 된다. 나중에 이 조직을 바탕으로 북한 정부와 조선로동당이 만들어진다. 남한은 좌우익의 첨예한 대립 속에 결국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민의를 수렴한 ‘대한민국’ 헌법이 만들어지고 민주정부가 수립된다.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한 직후인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남한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남쪽으로의 전기 공급을 중단 시켜 버렸다. 일제강점기 대단위 공업지대가 함경도 지역 등에 조성되면서 공업단지에 공급될 전기 에너지 생산 시설도 원활한 수급을 위해 그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해방 이후 국토는 분단되었지만 남한이 북한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공급해 주고, 북한은 남한에 전기에너지를 공급하는 물물교환의 형식으로 ‘산업의 동맥’인 전기에너지를 공유했었다. 하지만 북한의 일방적인 단전 조치 이후, 전체 전기에너지 수요의 70% 가량을 북에 의지하고 있던 남한은 전기 부족으로 큰 혼란을 겪었으며 남북은 경제공동체의 마지막 끈인 전기에너지 공유가 없어지게 되어 ‘국토 분단’과 ‘사상 분단’ 이후, ‘경제 분단’의 과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전쟁의 아픔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된 이후 양측의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이때 북한의 김일성은 남침 전쟁을 계획하고 소련과 중국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했다. 김일성은 전쟁을 수행할 ‘인민군’을 창설하고 탱크와 같은 무기를 소련으로부터 지원 받아 군사력을 강화 시켰다. 특히 중국으로 부터는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전투 경험이 많은 팔로군 출신 ‘조선족 병사’들을 지원 받기도 했다.


1950년은 북한 입장에서 보면 남침 전쟁을 일으키기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조만식과 같은 영향력이 있는 민족주의자와 기독교세력을 정치에서 배제시키며 공산주의 정권을 세운 북한에게 그 다음 과제는 자연히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였다. 남한에서는 단독 정부가 세워지기는 했으나 아직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였고, 남한 곳곳에는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좌익인사들이 비밀리에 사회 각 조직에 심겨져 있었다.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의 지리산 등으로 숨어들어간 이현상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 빨치산 세력들도 건재해 있었다. 남한의 정치인들과 군 관계자들은 전쟁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는 미국발 보고서 등에 의존하며 북한의 남침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 했을 때도 종종 벌어졌던 38선 부근에서의 교전쯤으로 생각했고 아침에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 대동강’에서, 저녁은 ‘신의주 압록강’에서 먹을 수 있다는 희망적 사고가 너무 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에 유리한 대외환경이 남침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북한의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고 미국은 한반도 보다는 일본의 안보에 치중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기자회견 도중 제시한, 대만과 한국이 제외된 미국의 태평양지역 방위선은 북한으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전쟁 초반 절대적인 열세에 놓였던 남한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3개월 만에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를 점령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군사적 지원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미국은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규탄하는 한편 유엔군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해있던 남한에게 오랜 가뭄 끝에 단비와도 같았다. 한국전쟁은 전쟁 방지와 평화유지를 위해 설립된 국제연합(UN)에 있어 첫 시험무대였던 셈이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합동으로 실시한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 때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계속하여 압록강까지 도달함으로써 민족의 숙원인 통일이 곧 달성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0월 하순경부터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다시 38선 부근으로 내려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전쟁이 소련이나 북한의 예상과는 달리 장기전의 양상을 띠자 소련은 유엔을 통하여 휴전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951년 7월에 개성에서 처음으로 휴전회담이 개최되었고, 2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당시의 전선을 휴전선으로 하는 휴전이 성립되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


1950년~1953년까지 벌어졌던 전쟁은 이해 관계자에 따라 그 호칭이 달라진다. 아마도 전쟁에 대한 의미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남한에서는 6․25동란, 6․25사변 등으로 주로 부르고, 북한에서는 미국에 대항해 싸운 ‘조국해방전쟁’으로, 일본은 ‘조선전쟁’,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며 조선을 도왔다는 ‘항미원조전쟁’, 그리고 미국은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라 부른다. 미국 워싱턴 D.C National Park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기념비에 가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그들이 알지도 못했던 나라, 만나보지도 못했던 국민들을 지켜주기 위해 나라의 부름을 받고 응답한 우리의 아들들과 딸들을 존경하며 영예롭게 여긴다.”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과 미국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너무나도 잘 반영한 문구 중 하나 다. 또한 한국전쟁은 2차 대전과 베트남전쟁 사이에 끼어서 잊혀졌다하여 잊혀진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 2차 대전이 종전 된지 5년 만에 벌어진 전쟁이라 주변 강대국들 모두 확전이 되면 3차 대전으로 간다는 적지 않은 부담감이 있었다. 따라서 휴전이란 미봉책으로 상황을 빨리 덮으려 했고, ‘베트남전쟁’처럼 명분도 약하고 치욕적인 패배를 준 전쟁도 아니기에 한국전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미국 워싱턴 D.C 내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도 베트남 참전 기념공원 보다 더 늦게 생겼다.



전쟁이 남긴 상처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의 아픔은 곳곳에 남아있다. 통일 되지 못하고 갈라진 국토, 가족과 뜻하지 않게 헤어진 이산가족들, 세계 최대의 화력과 병력이 밀집되어 있는 휴전선 155마일,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싸고 여전히 미묘한 갈등이 상존하는 국제질서, 3면이 바다에다 북쪽은 철책으로 가로 막혀 섬 아닌 섬이 되어 버린 대한민국의 생각과 공간적인 제약. 남남갈등으로 일컬어지는 남한 내에서의 이념 논쟁까지. 이 모든 것이 한국전쟁의 결과물들이다.


한국전쟁으로 한반도 전 지역에서 학교, 교회, 사찰, 병원 및 민가를 비롯해 공장, 도로, 교량 등이 크게 파괴되었다. 남북한 모두 사회경제적 기반 시설을 상실했다. 한국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남북 양측 군인의 사망, 부상, 행방불명 피해자는 121만 5천명, UN군 피해자는 15만 1,500명이었다. 휴전 직후 집을 잃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전쟁 피해자의 수가 2백만 명에 이르렀고 굶주림을 겪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25%나 됐다. 1949년 한해의 국민 총생산에 맞먹는 재산상의 피해가 발생했고, 농업 생산은 27%나 감소했다. 약 900개의 공장이 파괴됐고, 제재소, 제지공장 등 소규모의 생산시설들이 거의 파괴됐다. 특히 교통 관련 시설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북한의 피해도 남한 못지않았다. 북한의 발표에 따르면 인민군 사망 부상 행방불명 61만 명, 민간인 사망, 부상, 행방불명 피해자는 268만 명에 달한다. 핵심 산업인 광업, 공업, 농업의 생산력인 60~80%가 감소했다. 60만의 민가와 5천개의 학교가 파괴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전쟁의 피해는 전후 상당기간 동안 남북한의 경제의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인적, 물적 피해도 주었지만, 정신적으로 상대에 대한 깊은 불신과 적대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심리적 변화는 분단을 고착화 시켰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보이는 한국전쟁은 멈추었지만, 보이지 않는 한국전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