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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천리마’와 ‘대약진’







다니엘 고든의 카메라


영국 출신의 다큐멘터리 감독 다니엘 고든(Daniel Gordon)의 작품들은 북한 사회를 세세한 면까지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든은 지금까지 세 편의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집단체조(매스게임)에 참여하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어떤 나라>, 월북한 한 주한미군의 평양에서의 삶을 다룬 <푸른 눈의 평양시민>, 그리고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 북한이 세계적 축구 강호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하는 기적을 이뤄낸 당시 북한 축구단의 후일담을 담은 다큐멘터리 <천리마 축구단>이다.


<천리마 축구단>은 월드컵 축구 역사상 손꼽히는 장면에 드는 1966년의 북한 축구팀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의 카메라 비친 당시 북한팀의 모습은 체구는 작았지만 수준 높은 실력, 자신감, 팀워크를 가졌던 팀이라고 묘사 되었다. 각 작품에서 고든 감독은 북한 사회에서 의미 있는 사건들과 사람들을 통해 그 사회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북한 정부는 최대한의 배려(장소, 인터뷰)를 통해 촬영에 협조했다. 분명 북한에게 좋고 유리한 것만 보여주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한 점도 있다.






기적이라 소개된 ‘천리마 경제’


북한이 런던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키기 2년 전인 1964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조안 로빈슨은 북한을 방문하고 나서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1965. 2)에 “1964년의 코리아: 경제의 기적”(Korea, 1964: Economic Miracle)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은 1960년대 조안 로빈슨의 눈으로 본 북한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로빈슨이 방문했던 1964년은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나름의 사회주의 공업화가 꽃피는 시기였다. 북한의 통계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지만, 공식적인 자료상으로는 두 자릿수의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었고, 1인당 국민소득도 체제 경쟁 대상인 남한에 비해 4배나 높았다. 케인즈 학파의 일원이며 경제학계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갖고 있던 로빈슨의 글을 읽은 국내외의 사회과학자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북한은 빠른 전후복구, 김일성 권력체제의 강화, 높은 경제성장, 완전고용, 기본적인 복지 혜택, 경쟁상대인 남한에 대한 비교우위 등 체제에 대한 자신감에 차 있었다. 북한의 이러한 발전상은 해외에 있던 남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서독의 한국 유학생이나 유럽에서 활동 중인 윤이상, 이응로 같은 예술인들이 북한과 접촉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인 ‘동백림사건’도 이즈음의 일이다.


1960년대 북한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지로 농업기술자, 군인, 의료진 등을 파견하며 활발하게 제3세계 외교를 펼쳤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966년 영국 월드컵 축구 8강 진출도 이 무렵의 일이다. 1960년대는 북한 체제에서 있어 최고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경제상황, 남북대결 등에서 북한은 이보다 더 좋은 적이 없었다.


1966년 월드컵 축구 8강에 진출한 북한의 축구팀은 일명 ‘천리마 축구단’으로 이름을 알렸다. 여기서 ‘천리마’란 당시의 북한의 사회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다. 천리마는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말이다. 북한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와 같은 속도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자는 천리마운동을 전개한다. 1958년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천리마속도, 천리마직장, 천리마기수, 이중천리마작업반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국가 부흥을 꿈을 담은 대대적인 캠페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1972년 채택된 북한 사회주의 헌법에서는 “천리마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다”(제13조)라고 규정했을 정도이다.



실패한 ‘천리마운동’


1960년대를 빛낸 북한의 천리마 경제는 대외적으로는 정치적 동지 관계인 소련 및 사회주의 국가로 부터의 원조 및 저렴하게 물자를 구매하는, 일명 ‘사회주의 우호가격’의 덕을 본 것이다. ‘사회주의 우호가격’은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시장거래에 대항하여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들만의 자체 시장을 형성하며 각종 필요한 원자재와 물품 등을 거래했던 것을 말한다. 북한은 이를 통해 국제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에 석유와 각종 원자재를 얻을 수 있었다. 천리마 경제는 대내적으로 정치적 안정과 강력한 중앙 집중 계획경제에 힘입어 휴전 이후 폐허가 된 북한에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있었다. 잘 사는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의식주는 해결할 수 있었다.


1962년 김일성 주석이 이야기한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보통 인민의 삶이 곧 실현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천리마의 약진은 여기까지였다. 초과달성을 당연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각종 경제계획 지표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지표왜곡은 생산-유통-소비 과정의 경제 제반 행위에 대한 정보의 왜곡으로 이어지며 국가 경제 전체의 흐름이 걷잡을 수 없이 왜곡되어 버렸다. 또한 폐쇄된 계획 경제하에서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 부족과 조악한 제품의 품질은 경제의 질적 성장을 저해시켰다.







중국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천리마와 같이 발전을 거듭할 줄 알았던 경제의 성과부진은 북한만이 아닌 사회주의 국가 전체의 문제였다. 특히 1959년 중국의 마오쩌뚱(毛澤東)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은 경제 지표의 왜곡이 나라를 파탄으로 몰고 간 대표적인 예다. 중국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제2차 5개년 계획의 첫해인 1958년의 농공업생산 총액은 전년대비 48%의 증가를 보였고, 그 후 계속 비약적인 신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성장지수는 과장된 보고에 의한 것이었다.


1959년부터 연속 3년간 자연재해가 있었고, 옛 소련이 1960년 이래로 경제 원조를 전면적으로 중단한 데다, 중·소관계가 악화된 점 등의 원인으로 대약진정책은 중도에 좌절하고 만다. 실제적인 농업생산량은 대략 1958년 2억 2500만 톤에서 1960년 1억 8000만 톤으로 떨어졌지만 통계상으로는 매년 목표 생산량을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 정부는 왜곡된 통계수치에 바탕으로 어느 정도 식량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판단하여 농민들을 대단위 토목사업이나 제철사업에 동원했고 결국 몇 년 지나지 않아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이 늘어만 갔고 수백만 이상이 굶어 죽게 된다.


중국정부는 결국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인정하게 되고 이를 총지휘했던 마오쩌둥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1959년 마오에 이어 국가주석에 오른 류사오치(劉少奇)는 대약진 운동으로 야기된 농촌경제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조정정책'을 시행했다. ‘조정정책’은 농민의 개인 보유 땅을 인정하고, 농촌 자유시장의 부활과 그 확대를 통해 농민의 물질적인 이익을 자극하여 농업생산을 회복하려는 정책이었다. 일정 부분 개인의 이익과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는 정책 추진에 사회주의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인 마오쩌둥은 강력히 반대했다. 1966년부터 마오는 류사오치의 개혁정책에 위기를 느끼며 부르주아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에 대한 외침을 본격화 한다. 마오는 기성세대보다는 순수한 젊은 세대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마오는 청소년들을 향해 1871년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 ‘파리코뮌’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나설 것을 역설했다.


마오의 뜻을 받들기 위해 전국 각지마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선전․선동 그룹인 ‘홍위병(紅衛兵)’이 조직되었다.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활동하며 중국 전체를 경직된 광기의 사회로 몰아넣었다. 마오는 홍위병으로 하여금 교사, 작가, 모든 예술 분야 종사자, 그리고 부르주아 이념을 지닌 당 간부들을 비판하도록 부추겼다. 비판은 곧 굴욕 행위와 투옥, 고문, 살인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빠른 속도로 대 혼란에 빠졌다. 국가주석 류사오치를 비롯한 마오쩌둥에 반대되는 세력은 모두 실각되거나 숙청되었다. 법과 이성은 마비가 되고 오로지 ‘마오의 말씀’과 그에 대한 주관적 해석만 존재했다.


공산혁명의 주체였던 중국 공산당의 주요 인사들들 마저 홍위병에게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혔다. 그 누구도 홍위병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홍위병은 무소불위 그 자체였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자체적으로 홍위병을 조직하여 자신을 방어해 나갔다. 하나의 권력이 되어버린 홍위병 안에서도 분파가 생겨났다. 각 분파의 이익을 위해 홍위병간의 싸움이 벌어졌고 중국 사회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해져 붕괴 일보 직전까지 갔다. 이 혼돈의 중국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힘은 군대인 ‘인민해방군’ 밖에 없었다. 1967년 이후 군은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데 참여하기 시작했다. 군이 참여 했다고 해서 문화대혁명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후 간헐적인 갈등은 계속되었으며 1976년 마오가 사망한 뒤에야 ‘문화대혁명’은 비로소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적 오류’였다는 공식적 평가를 내렸고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급속히 소멸되었다. 역설적으로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사라진 후 그나마 남아 있던 혁명의 불씨마저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리고 덩사요핑(鄧小平)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가 개혁정책이 실현되었다. 그것이 오늘날 미국과 함께 G2라 불리는 중국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