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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혼돈의 세계




‘The Great War’ 를 아십니까?


제1차 세계대전의 영어 표현은 The 1st World War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은 The 2nd World War이다. 지금이야 이 두 번의 세계전쟁이 1, 2차로 구분이 되지만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1차 대전을 The Great War(대전쟁)라 불렀다. 1차 대전은 규모나 사용된 무기 면에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전쟁이었다. 현대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탱크와 기관총, 참호전이 이때부터 등장했고 대량 살상무기는 군인과 민간인의 희생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12월 크리스마스에는 영국군-독일군 사이에 세계 전쟁사에서 유래가 없었던 ‘크리스마스 휴전’도 이루어졌다.


1차 세계대전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 동안 지속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연합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터키가 동맹국으로 전쟁을 벌였다. 1차 대전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군국주의(Militarism), 동맹관계(Alliances), 제국주의(Imperialism), 민족주의(Nationalism)이다. 이러한 원인들의 앞 글자를 따서 메인 (MAIN)이라 불리기도 한다. 민족주의는 반봉건적인 정치이론이지만, 민족국가의 이익을 위해 다른 약소국가를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로 변질된다. 특히 유럽의 남동부 발칸반도는 다양한 민족주의의 각축장이기도 했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서로 많은 식민지를 얻기 위해 다투었고, 자국의 식민지를 다른 열강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독일의 경우 식민지 확장을 위해 해군력을 강화하였고, 당시 최고의 해군력과 식민지를 자랑하는 영국은 이에 위기감을 느끼며 독일에 지지 않기 위해 군비를 더 늘려야 했다. 또한 당시 유럽 국가들 간에는 서로간의 안보를 지켜주는 동맹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동맹관계는 결국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고 만다.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암살자 프린치프는 세르비아의 테러 조직에 연계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정부가 암살의 배후라고 믿고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이렇게 해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차 대전으로 군인 3,000만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재산 피해가 가장 컸던 곳은 프랑스와 벨기에였다. 그리고 전쟁 이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의 환경은 급속도로 변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와 중동의 식민지들이 재편되었으며 각국 경제재건과 국민생활 안정을 위해 화폐를 많이 발행하는 바람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패전국인 독일의 경우 전쟁 배상금 문제와 상상을 초월한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더욱 악화 되었고 실업자가 600만 명이 넘는 등 국민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수레에 가득 돈을 싣고 가야할 정도였다. 독일 경제의 혼란은 훗날 히틀러의 나찌가 등장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대동아(大東亞)’의 병참기지, 조선


1차 세계대전 이후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며 도약을 모색하던 세계는 1929년에 미국발 세계경제대공황이 닥치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국가권력이 국민생활을 간섭하고 통제하는 ‘전체주의’가 등장하게 되고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대외 침략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된다. 일본의 식민지 국가였던 조선은 그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본은 조선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전 분야를 일본 방식에 기초를 두며 운영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제대로 조선을 경영할 수 있도록 돕는 일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조선인은 생각하면 안 되었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서는 알아서도 안 되었다. 1924년에 설립된 조선 유일의 4년제 관립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에 정치학과를 개설했다가 곧 취소해 버린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에게 조선은 자원 수탈의 대상이며, 자국의 생산품 소비시장이었다. 그리고 열등감이 가득한 충성스런 식민지 백성들이 있는 곳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대동아공영권’이란 슬로건을 내세운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일본이 차지하겠다는 야욕을 보인 것이다. 이때 일본은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 사람들에게 황국신민이 될 것을 종용하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리고 조선을 대규모 군수품 생산기지로 전락시켰다.



태평양전쟁 그리고 만주


‘태평양전쟁’은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미국, 영국, 기타 국가로 구성된 연합국과 벌인 전쟁이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 불렀다. 이 전쟁의 시작은 만주사변, 중일전쟁의 전개와 관련하고 있으므로 넓은 의미로 태평양전쟁에 이 전쟁들도 포함이 된다. 만주사변은 1931년 9월 일본군이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을 침략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32년 일본의 지배를 받는 무늬만 국가인 만주국을 건국하고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를 국가원수로 삼는다. 일본이 푸이를 국가원수로 세운 이유는 간단하다. 만주지역이 바로 청나라 왕조를 세운 여진족의 활동하던 곳이 때문이다. 지금 이 지역은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에 해당이 되며 흔히 동북3성이라 부른다.


만주는 한때 동양의 서부로 불렸다. 중화학·군수공업 단지 건설에 힘입어 1931년 2억 엔 수준이던 공산품 생산액이 1943년에는 40억 엔 수준으로 뛰었다. 일본이 1930년 세계를 휩쓴 대공황을 가장 빨리 벗어난 것도 일종의 만주 특수 덕분이다. 만주국의 국기(國旗)는 노랑, 빨강, 파랑, 하양, 검정색이 혼용된 깃발을 하였는데 노랑은 만주족과 통일, 빨강은 일본 민족과 용기, 파랑은 한족과 정의, 하양은 몽골족과 순수, 검정은 조선족과 결의를 상징하였다. 우리민족도 만주국의 주요 구성원 중 하나였다. 1940년대 만주인구 중 조선인은 210만 명 정도였다.


실제로 만주는 우리에게 가슴어린 ‘기억의 공간’이다. 한때 고조선·고구려·발해에 이르는 선조의 터전이었고 근대 이후 그곳은 말달리던 선구자들이 활동하던 전설적인 ‘항일투쟁의 성지’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만주는 비단 우리민족만의 이야기가 있는 곳은 아니다. 19세기 만주에는 한족·만주족·러시아·조선인·일본인·몽고인들 외에도 프랑스·독일·폴란드·우크라이나·타타르 등 50개가 넘는 민족, 45개 언어가 혼재했다. 만주는 다양한 민족을 빨아들인 블랙홀이자 욕망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만주는 조선인에게 국외 무장 항일투쟁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 역시 반제국주의 투쟁의 중심 장소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대동아 정책의 최전선이자, 소련의 남하를 막는 전초기지였고, 태평양전쟁 이후로는 일본의 대동아공영을 위한 발판이었다.






만주행 엑소더스


달 실은 마차다 해 실은 마차다

청 대콩 벌판 위를 휘파람 불며 가자

저 언덕을 넘어서면 새 세상의 문이 있다

황색 기층 대륙 길을 어서 가자 방울소리 울리며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배경으로 한

영화 <복지만리> 주제가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되자 일본은 조선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일종의 만주행 엑소더스가 조선 사회의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확천금과 출세의 꿈을 안고 만주를 찾는 이가 늘었다. 만주국에 거주하던 조선인 200만 명 중에는 농사꾼, 벌목공, 장사꾼, 아편장수, 독립운동가, 친일 만주국 경찰관 등이 섞여 있었다. 1941년 개봉된 영화 <복지만리>는 만주에서 이민 생활을 하는 조선인의 삶을 그린 영화로 만주 현지에서 촬영되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주제는 만주 이민을 미화하고 장려하는 내용이었다.


지식·예술인들에게도 만주행은 유행이었다. 자국 활동에 한계를 느낀 동아시아 문인들은 한데 모여 '만주문학'이란 독창적 장르를 낳기도 했다. 한국 영화의 선구자인 나운규·윤봉춘도 만주에서 자랐고, 유치환·이태준·한설야 등이 기행문을 남겼다. 조선과 일본에서 만들어진 만주소재 가요만 해도 500곡(조선 110곡, 일본 400곡)이 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만주 열풍은 한국 영화에 일제강점기 만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일명 ‘만주 웨스턴’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형성하기도 한다.


‘만주국’은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막을 내린다. 하지만 만주의 영향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없어진 만주국이었지만 일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 아래 ‘관료가 통제하는 경제’는 일본에 이식돼 관주도형 경제로 굳어졌다. 일본의 성장을 이끈 관료와 정치인의 상당수가 만주국 관리나 만주지역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 출신이다. 한국 역시 만주국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교사를 포기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는 훗날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군과 정계의 요직은 함께 만주군에 근무했던 선후배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한국과 일본 모두 전후 국가 재건 과정에서 ‘만주국 경험자’들이 제법 큰 영향을 끼친 셈이다. 그럼 북한은 어떨까? 북한 역시 만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주를 기반으로 활동을 했던 항일 빨치산들이 북한 체제 형성의 근간을 이룬다. 김일성과 그 주변 인물들이 대부분 빨치산 출신들이다.






혼돈의 세계가 낳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이며 세계적 여행가였던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19세기 후반에 조선을 방문하고 기행문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조선에 대한 그녀의 첫 인상은 절망적이었다. “이렇게 더럽고 게으르며 부패한 사회는 처음 본다.”는 것이 조선에 대한 그녀의 총체적인 감상평이었다. 그런데 만주와 시베리아를 여행하며 여사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 곳에서 조선반도에서 본 조선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본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의 조선인은 채소 공급을 거의 독점하고, 만주에선 중국인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었다. 고향을 떠난 조선인들은 이방 사회에서 더 열심히 더 풍요롭고 밝게 살고 있었다.


비숍 여사가 본 만주를 비롯한 이방 땅의 조선인은 1870년대 시작된 ‘디아스포라’의 전형을 보여준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원래 유태인의 민족적 이산 상황을 뜻하는 용어였지만, 현대에서는 고국을 떠난 난민이나 이민 그리고 그 후손들을 총칭하는 단어로 쓰고 있다. 식민지 치하에서 만주로 이주의 길을 떠난 조선인들은 한일 병탄 이래 일본신민이라는 법적 지위를 지닌 채 일본영사관의 관할 아래 있다가 만주국이 수립된 뒤로는 만주국 국민의 일원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만주국 국민과 일본 식민지 백성의 틈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이들은 1945년 광복 이후에 또 다시 사분오열되었다. 만주 정착자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조선족이라는 지위를 얻게 되고, 남한 귀환자는 대한민국 국민, 북한 귀환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이 되었다. 과연 이들에게 한민족과 한국인이란 의미는 무엇일까?


이와 같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20세기 초 일제 침략기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됐다. 우리 동포는 일제의 수탈과 강제 징용을 피해 만주나 연해주로 이주했으며 더러는 태평양을 건너 이역만리 타국인 하와이나 멕시코, 브라질 등의 농장 노동자로 팔려가기도 했다.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카레이스키’, 멕시코의 ‘애니깽’ 등으로 불린 이주 한인들은 갖은 역경과 핍박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형성, 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문화를 유지해 왔다. 혼돈의 세계 속에서도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