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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




찰리 채플린은 20세기를 풍미한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한 사람이다. 채플린은 사회 약자를 위해 자신의 모습을 희화화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1950년대 채플린은 진보적이며 사회고발성이 짙은 작품들에 출연하였다.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미국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는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채플린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웃음을 주고자 했던 휴머니스트일 뿐이다. 채플린은 희극 속에서 비극을 이야기했고, 현실의 모순들을 스크린 속에 적나라하게 담았다.


채플린이 주연한 영화 <모던 타임스>(1936)는 산업화가 가져온 인간소외의 문제를 통렬하게 풍자한 일종의 ‘블랙 코미디’이다. 영화 속에서 찰리는 컨베이어 벨트 공장에서 일한다. 그의 하루 일과는 나사못 조이는 일이다.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맞춰 일하느라 겨드랑이를 긁을 시간도 없고, 자신을 공격하는 벌을 쫓을 시간도 없다. 다른 행동이나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오로지 나사만을 조여야 한다. 찰리는 단순 작업에 지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조여 버리는 강박 관념에 빠지게 된다. 결국 찰리는 정신병원까지 가게 된다.


병원에서 퇴원한 찰리는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방황하다가 시위 군중에 휩싸여 감옥에 끌려가게 된다. 몇 년의 감옥살이 끝에 풀려난 찰리는 빵을 훔친 예쁜 소녀를 도와준다. 그리고 이후 찰리의 모든 행동은 소녀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근사한 집을 사기 위해 백화점 경비원으로 취직하기도 하고, 철공소에서 일도 하게 되지만 번번이 문제가 발생하며 일을 접어야만 했다. 소녀의 도움으로 카페에서 일하게 된 찰리는 자신을 추적하는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된다. 거리에 나선 찰리와 소녀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가게 된다.


채플린은 <모던 타임스>에서 당시 미국의 자화상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자동화 기계 속에 말살돼가는 인간성과 산업사회가 가져다준 필연적인 인간소외의 문제를 빠른 템포의 팬터마임(pantomime)과 생생한 블랙유머로 그려냈다. 찰리가 기계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장면은 인간이 산업사회를 떠받치는 한낱 기계 부품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태엽 사이에 끼어 있는 채플린이 기계사회의 운행을 방해하는 이물질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더 발전된 기계, 실용적인 물건만을 추구한다. 마치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자동 급식기를 발명하여 밥 먹는 것마저 기계화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편리함이라는 이익을 얻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21세기 감성의 시대 분단을 넘어 통일을 준비하는 이 시점에 영화 <모던 타임스>는 문명의 편리함 속에서 사람에 대한 존중을 잃지 말아야 것을 이야기 한다. 통일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이념, 물질, 명분보다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