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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붉은 깃발

이데롤로기 갈등을 이야기 하기 전에


1910년 한국이 일본에게 강제로 병탄된 이후 공식적인 국가로서의 한국은 국제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단지 임시정부와 한국인들만 있었다. 한국이 일본의 테두리 속에서 갇혀 있는 동안 세계사의 흐름도 변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의 ‘평화’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정치-경제적으로 얽혀 속으로 곪아 있던 관계가 폭발하여 결국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 사이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평화는 깨지고 사람들은 전쟁터로 나갔다. 기관총, 탱크 같은 첨단 무기들이 이 전쟁부터 사용되어 대량 살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전쟁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러시아는 전쟁 도중 혁명이 발생하면서 전쟁에서 이탈하고 만다.


러시아 혁명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사회주의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가 태어가기 이전에 사람들은 상당히 단조로운 삶을 살았다. 대부분 농사를 지었으며, 조상에게서 전수된 기술은 다시 아들과 그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사회는 전통과 관습의 지배를 받았으며, 변화를 일으킬만한 동인은 아주 미약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급자족의 생활을 했고, 물건의 교환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15세기 말 자연적․사회적 제약들이 타파되기 시작했고, 관습과 제도에 얽매여 있던 사람들이 속박에서 해방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상업이 발달하고 ‘이익’을 최우선 순위로 하는 자본가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전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발전의 동력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삶을 바꾼 산업혁명


1585년 세계 최강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치며 바다를 점령한 영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각국에 식민지를 건설해 나갔다. 1700년대 이후 영국은 유럽의 최강자였지만, 중국으로부터 정치제도, 경제제도, 농업기술, 제철기술, 사상, 예술 등에서 많은 차용과 모방을 해왔다. 식민지에서 수많은 원재료와 금은 등을 약탈해 왔지만 중국의 경제와 문화를 넘어서지 못했다. 영국이 중국을 넘어선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왔다. 증기기관차가 발명된 이후로 산업혁명의 근간인 석탄과 철강, 면화 산업이 방사상으로 뻗어나갔다. 최초의 증기기관은 광산 배수를 목적으로 발명됐고, 이 광산에서 나온 석탄이 다시 증기기관의 연료가 됐다. 증기선으로 영국에 실려 온 면화는 증기방직기를 이용해 천으로 바뀌었고, 증기기관차에 실려 시장으로 나갔다. 또한 이 증기기관이 발명되기까지는 수천 가지의 발명을 필요로 했고, 증기기관이 등장한 이후로 더 혁신적인 발명품들이 무한정 쏟아져 나왔다. 증기기관은 다른 발명품과는 달랐다. 기술 혁신이 경제 개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생산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의 수공업적인 생산방식에서 공장제 기계공업이 시작되었고 자본가적 제조업자, 상인, 임금 노동자와 같은 오늘날의 산업 계층 구조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시장이 형성 되고, 오로지 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공급자(기업)가 존재했고 그 기업에서 일하면서 오로지 임금에 의해 생존이 가능한, 그리고 그 임금으로 기업의 생산물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양산 되었다. 이렇게 생산자와 수요자가 명확히 구분되면서 근대 자본주의 시장이 만들어졌다.


산업혁명을 거치며 자본주의는 눈부신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다. 18세기 중반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은 면공업에서 방직기술이 발달하면서 빠른 기계화가 진행되었다. 면공업은 19세기 전반에 5% 이상 성장하면서 산업혁명의 동력이 되었다. 또한 산업화로 인해 철의 수요가 증가하고 철강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또한 산업혁명으로 인해 오늘날 인류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인 환경, 자원, 에너지, 인구, 경제 불균형 등의 사회문제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소외 계층의 출현


산업혁명은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기 위한 씨앗과 같았다. 산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에게는 많은 혜택이 주어졌고, 사람들에 따라 그 혜택에 대한 반응 정도는 달랐다. 더욱 더 많은 경제적 부를 누리게 된 유럽의 중상류층 사람들은 경제 발전이 유익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생산기술의 발달과 높아진 경제 수준으로 새로운 제품들을 구매 할 수 있게 되고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여행하기도 편리해지면서 중상류 사람들의 새로운 문명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숙련된 장인들이 월급을 받는 노동자로 전락하고, 도시는 매연으로 가득한 장소로 변해버렸다. 산업화의 진행으로 사회 전체의 부는 향상 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하루에 12시간 일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심할 때는 15시간 이상씩 일해야 했다. 받는 임금으로는 최저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소수의 부유한 자본가와 대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대립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초창기 자본가와 노동운동가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영국 정부는 자본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단결금지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단결을 저지했고 노동자들은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이라 불리는 기계 파괴행위를 하며 맞섰다. 노동자들은 새롭게 발명된 기계를 자신들의 일자리를 잃게 만드는 공공의 적(?)으로 간주했다. 영국 정부는 기계 파괴 행위를 하는 노동자를 사형에 처하게 하는 법까지 만들었다. 산업혁명이라는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경제발전의 이면에는 이렇게 새로 생겨난 계층간의 대립과 갈등, 반목이 있었다.



‘로버트 오웬’과 ‘칼 마르크스’


시간이 흘러 열악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목소리가 높아졌고, 나아가 노동자들의 이런 상태를 근본적으로 바꿔야한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노동자들의 이와 같은 처지는 결국 공장이나 그 설비 등과 같은 생산수단을 개인이 소유하기 때문’이라며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여야 한다는 일련의 사상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이를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소규모 집단거주지에서 생산수단을 공유하며 평화롭게 살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를 실제적으로 실천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로버트 오웬(Robert Owen, 1771-1858)이다.






오웬은 16살 때부터 공장일을 시작해 19세 때에는 독립해서 공장 경영주가 됐으며, 20세 때에는 직원 500명을 거느린 대공장의 지배인이 된다. 또한 29살 때인 1800년에는 뉴라나크로 진출해 대공장의 경영을 맡게 된다. 오웬은 이 공장에서 이윤의 추구 보다는 노무관리나 후생설비에 전념하면서 생산율과 수익을 증대시켜나갔다. 특히 그는 아픈 노동자들을 위한 기금 마련 등 노동자의 인권과 복리후생에 많은 신경을 썼다. 오웬은 6세에서 7세 정도였던 아동의 노동연령을 10세 이상으로 제한했고, 10세 미만인 아동들을 위해 세계 최초의 유치원을 설립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산업혁명이 가져다 준 병폐를 몸소 체험한 오웬은 이러한 문제점을 정리해 <사회에 대한 새로운 견해, A New View of Society>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게 된다. 이후 체계화된 사상을 기본으로 자신이 경영하는 방직공장 내에 ‘성격형성신학원’(New Institute for the Formation of Character)을 설립하였다. 또한 오웬은 아동노동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공장법 제정운동을 추진해, 결국 1819년에 이를 이루게 된다. 아동권익이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이후 공동육아 공동체인 '어쏘시에이션(association)'을 만들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하모니타운'이라는 공동체 실험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노동조합, 협동조합운동 같은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한다.


마르크스는 오웬의 이러한 시도를 공상적이라고 비판하며 이후 새로운 사회주의(공산주의) 흐름을 이론적으로 이끌어 낸다. 그는 그의 사상을 ‘과학적 공산주의’라고 하면서 단순히 사유재산제도의 폐지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제도의 폐지에 뒤이은 공산주의 도래가 역사적으로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과학적 법칙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소수의 자본가가 대부분의 부를 소유하는 구조를 극복하고 더 높은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자본가 계급을 타파하여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계급제도를 없애는 공산혁명을 통해 공산사회를 이루어야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생각을 모아 1848년 영국 런던에서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을 만들어 낸다. 바로 자본주의 모순에 대항하여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들이여 단결하라”를 외친 공산당 선언이다. 공산당 선언은 절망의 늪에 있던 많은 노동자들을 선전․선동하기에 충분했다.







1917년 ‘붉은 혁명’


1848년 영국에서 공산당 선언이 이루어진 후 공산주의 사상은 유럽 전역을 강타했다. 각 나라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세력이 형성되었으며, 산업화의 어두운 이면에 놓은 노동자·농민들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공산당을 하나의 대안세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사회의 중심이 되어 국가 권력을 장악한 첫 나라는 산업화된 영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농업국가 러시아였다. 1917년 3월 제정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식량부족을 견디다 못해 시민봉기가 일어나 왕정을 붕괴시켰다. 황제인 니콜라이 2세는 3월 퇴위를 선언하고, 니콜라이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제위승계를 거절함으로써 300년 이상 지속되어온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2월 혁명으로 절대 권력인 짜르체제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임시정부는 전쟁계속정책을 취하였다. 따라서 평화와 생활의 안정을 구하는 대중의 불만이 높아졌다. 또한 임시정부는 왕정을 복고하려는 지주들과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부르주아 계급(자본가), 그리고 평화적인 민주정부를 목표로 하는 멘셰비키 세력 사이에 노선 갈등이 일기 시작한다.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난한 농민들을 위한 토지 재분배 정책은 말만 있을 뿐 실행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혁명과 개혁은 진행되는 듯 했지만 노동자, 농민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었다. 이때 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볼셰비키 세력은 노동자, 수병, 병사들의 협조로 세력을 넓혀가고, 결국 철도소비에트, 농민소비에트와도 연합을 이루고 또 다른 혁명을 진행한다. 이른바 11월 볼셰비키 혁명이다. 이후 독일과의 휴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거쳐 반혁명세력을 물리치고 결국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의 수립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러시아의 붉은 혁명은 성공한 그 순간부터 모순을 드러내고 만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그들이 그렇게 비판하던 멘셰비키 세력처럼 짜르시대의 군대지휘관 세력을 자신들의 군대 지휘관에 영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굶주림에 대한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노동자, 농민, 사병 계급의 불만이 고조되자 비판의 목소리를 강제적으로 진압했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비판하던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신경제(NEP)라는 시스템으로 일부 도입하기도 한다. 혁명을 이야기하고 혁명에 성공했지만 성공과 함께 그들이 비판하고 타고하고자 했던 시스템과 그 시스템의 속한 사람들을 활용해야 했다.


러시아의 붉은 혁명은 세계 각지의 혁명을 꿈꾸는 이들의 마음속에 일종의 ‘로망’을 심어 주었다. 1929년 미국 발 세계 경제대공황이 일어나자 약속한 듯이 세계 곳곳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세력들이 일어났다. 일명 ‘아나키즘’이라 불리는 무정부주의도 스페인에서 일어나 전 세계 혁명가들을 이베리아 반도로 끌어 들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 1945년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체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지역에 사회주의국가 건설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프리카의 경우 대부분 식민지 상태였고 남미 지역은 막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으나 미국의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동아시아는 일본이 패권을 잡기 위해 급부상하면서 ‘사회주의 국가’가 만들어질 여지가 없었다.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1920년대부터 일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을 이끌어줄 구원자로 여겼다.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며 ‘저항’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했던 시인 이상화도 사회주의 성향의 예술가 모임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사회주의는 1945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교-슬라비아 같은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아시아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소련에 의해 한반도 북쪽에 그리고 중국, 몽골, 베트남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2,500년 전 그의 저서인 ‘정치학’에서 공산주의 사상의 철학적 근원이라고 평가되는 그의 스승 플라톤의 ‘사유재산 폐지’ 및 ‘전체주의’ 사상을 비판하면서 ‘사유재산의 폐지가 결코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아니며, 그러한 전체주의는 국가적 파탄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공산주의는 시작과 함께 예견된 몰락의 길로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