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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아 ! 대한제국

 




벨 에포크 
La belle epoque

1900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유럽 사람들에게 앞으로의 세상은 어떤 모습 이었을까? 결론부터 내리자면 정치는 안정되고 경제는 발전되고 사회는 한층 더 풍요로워지는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었던 희망의 세상이었다. 1900년대 초 유럽과 미국의 도시인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것들을 둘러보며 뿌듯해했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서로 경쟁관계이면서도 세심한 외교를 통해 1871년 보불전쟁이 끝난 이후 30년간 평화를 유지하던 때였다. 대서양을 끼고 있던 유럽과 북미 대륙 모두 이런 평화와 안정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열린 파리 박람회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기의 희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파리의 풍경을 좋은 시대란 뜻의 <벨 에포크 La belle epoque>라 부르기도 했다.

1900년 19세기의 놀라운 과학기술과 경제의 성과를 기념하고 새롭게 열리는 20세기의 발전을 기원하는 만국 박람회(엑스포)가 낭만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다. 파리 박람회에 증기 기차와 승합마차를 타고 온 관람객들은 최신형 교통수단으로 전람회장을 누볐다. 전람회장은 움직이는 도로가 있어서, 각 나라가 자신들의 산업기술을 경쟁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전시관으로 사람들을 데려다 주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산업 국가였던 영국은 중공업 기술을 선보였고. 신흥 공업국 독일은 최신 기계식 도구들과 자동차를 들고 나왔고 점차 유럽을 따라잡고 있던 미국도 다양한 제품들을 전시하며 신대륙의 부를 마음껏 과시했다.

에너지 전시관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관중들이 모여들었다. 당시는 각 가정에서 석유등이나 촛불을 사용하던 시기였으니 신기한 전기불이

휘황찬란하던 전시관은 구경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파리박람회에는 대중오락의 성격을 바꿀 새 발명품이 보였다. 바로 ‘천연색의 활동사진’이다. 이외에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처음 공개된 냉장고, 에스컬레이터 등은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파리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

19세기를 마감하고 20세기를 여는 축제의 장이였던 파리 박람회에는 동양에서 온 생소한 한 나라도 참가했다. 바로 The Greater Korean Empire, 대한제국이었다.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은 근대화를 위해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 대규모 국제 행사에 주목했다. 조선은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간소한 전시대를 설치한 적은 있으나 전시관을 건설하고 대규모 대표단을 파견한 적은 없었다.

1896년 1월 프랑스 서리공사 르페브르가 1900년 4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박람회에 조선을 공식 초청했으며 고종이 흔쾌히 허락했다고 기록돼 있다. 1897년 1월, 박람회 사무국과 다리 역할을 할 프랑스 주재 특사 및 전권공사로 민영환이 임명된 데 이어 1898년 8월 대표단 명단이 발표됐다. 1899년 6월 3일자 독립신문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품을 출품할 사람을 모집하는 재정후원자 트레물네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전시관은 곧 국력의 상징이었다. 저마다 특색을 살리면서 가장 눈에 띠는 건물을 세우려는 참가국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조선에게는 샹드 마르스 서쪽 쉬프렌대로, 영국 제과관과 향수부속관 사이의 부지가 주어졌다.

당시 파리 만국박람회를 소개했던 잡지와 신문기사, 공식 소개 책자를 보면 대한제국 전시관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한국정부 대표단은 쉬프렌 대로에 극동의 모습을 가장 잘 살린 우아하고 독창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320제곱미터에 이르는 건물은 화려한 색을 칠한 목조건물로 넓은 기와지붕을 이었고 골조는 금빛으로 빛난다. 위로 치솟은 처마 끝은 이곳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입구는 서울의 주택 문을 재현했다. 내부는 서울의 황제가 기거하는 옛궁의 알현실(경복궁 근정전)을 본떴다.”

“모든 벽에는 오래된 명주천이 걸려있다. 전시관 주위는 난간이 있는 회랑이 있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공식 책자)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화려한 색깔이 입혀져 있고 극동 건축의 특징인 하늘을 향해 치솟은 처마끝과 커다란 지붕이 있는 한국관은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건축가는 황제의 고궁에 있는 알현실에서 받은 영감을 마음껏 발휘했다.” (1900년 발간된 서적 ‘파리박람회’)

당시 ‘라 퐁데리 티포그라피’ ‘르 프티 주르날’같은 신문 잡지의 기사들도 악기, 자개 공예품, 그림, 장롱, 도자기, 자수, 의복 등 전시된 귀중한 소장품과 토속품들은 한국이란 나라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특히 기자들은 인쇄술의 역사를 다룬 책들을 전시한 진열대 앞에 한동안 멈춰 섰다. 콜랭 드 플랑시 공사가 구입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00년 11월 12일 박람회는 폐막했다. 56개 초청국 중 40개국이 참가했으며 총 방문객 수는 5086만 800명에 이르렀다. 대한제국은 농산물 가공식품으로 대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2개의 금메달(야생작물과 의류), 10개의 은메달(가구 도자기 자수 의복 종이 등), 5개의 동메달, 3개의 장려상을 받았다.



대한제국 그 후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는 대한제국에게는 나라의 정체성을 알리고 세계와 교류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같이 만들어 나갈 것 같은 새로운 기대를 불어 넣어 주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장미 빛은 파리만국박람회가 마지막이었다. 20세기 들어 일본의 조선 병탄 전략은 본격화 되었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며 1907년 네덜라드 헤이그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는 대표단을 파견했으나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형체가 남은 대한제국을 병탄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대한제국. 1392년부터 이어져 온 조선의 역사는 역사책 속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일본의 35년 식민통치가 시작되었고 한반도안의 백성들은 황국신민의 삶을 살아야 했으며 일제에 수탈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백성들이 한반도를 떠나 만주로 소련 연해주로 미주 대륙으로 이주했다. 현재 전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700만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바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으로부터 시작된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우리의 힘에 의한 해방이기 보다는 강대국의 군사력에 의한 해방이었기에 해방된 한반도에서 우리 스스로 ‘새로운 나라’에 대한 고민을 할수 있는 공간도 시간도 부족했다. 38선을 기준으로 분단된 남과 북은 각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이며 다른 길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 분단의 구조는 세계 질서가 바뀐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100여년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역사는 누가 옳고 그른지의 편가름이 아닌 과거의 아픔에 대한 화해의 길을 모색하고 앞으로 이룰 역사를 상생하며 공영하고자는 마음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