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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대량생산’ 그리고 ‘인간소외’





‘우미관’과 ‘찰리 채플린’


일제 강점기에 경성(서울)의 문화는 일본인의 남촌(명동, 충무로)문화와 조선인의 북촌(종로)문화로 거의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당시 남촌의 거리는 식민지 수도 경성의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관공서, 은행, 상가, 도로 포장, 신호등, 가로등, 네온 광고판 등 근대 도시의 겉모습을 갖추고 있었지만, 북촌의 거리는 그렇지 못하였다. 북촌상가는 일제의 억압과 통제 그리고 낙후된 환경 속에서도 남촌상가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민족계 상업자본을 형성했다. 당시 김두한과 같은 협객들의 세계를 다룬 이야기들이 북촌(조선상권)을 배경으로 남촌(일본상권)에 대항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도 다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다.


당시 북촌인 종로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인 ‘우미관’이 있었다. ‘우미관 구경 안하고 경성 다녀왔다는 말을 하면 거짓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우미관은 경성의 명소였다. 무성영화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 최고의 인기배우는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이었다. 그의 영화중 <황금광 시대>(1925년)는 장안의 화제를 이룰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매회 1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우미관 극장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찰리 채플린의 연기에 식민지 조선 사람들은 웃고 울었다. 아마도 채플린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모습 혹은 독재자 밑에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대중들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듯싶다. 이것은 비단 조선 사람 뿐 아니라 영화가 상영되는 전 세계 관객의 마음이었다.



대량생산시대의 개막


채플린의 영화에는 유독 공장과 관련된 장면이 많이 나온다. 공장은 곧 산업화 시대의 상징이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들은 소비의 세계로 사람들을 유혹했고 세상의 변화를 주도해 나갔다. 한 때 생산현장의 전문가들은 20세기가 자전거에다 전동모터를 단 ‘오토바이의 시대’일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 당시 산업 수준과 사람들의 인식에서 ‘오토바이’가 앞으로의 대세라는데 큰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공장의 생산방식을 바꾼 것은 ‘오토바이’가 아닌 ‘자동차’였다. 당시에도 자동차가 있긴 했으나 제조 공정도 복잡하고 가격이 비싸 대중교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말 없는 마차’라 불렸던 자동차는 부자들의 사치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부자들의 장난감이었던 자동차는 한 미국 기업가에 의해서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바로 헨리 포드(Henry Ford)이다. 그는 대량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꿈을 가졌다. 구매자가 만족할만한 싼 자동차 ‘모델T’를 생산하기 위해 헨리 포드는 자동차 조립방법을 혁신적으로 바꿨다. 이 과정에서 포드는 노동자의 작업시간을 측정하고 그들의 목표량을 설정하는 과업 관리를 통해 작업의 효율을 극대화한 ‘과학적 관리법’을 만든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의 영향을 받았다.





포드는 먼저 노동자들의 작업 방식을 개선했다.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흘러가는 물건에 단순한 조작만 가하면 되도록 작업대를 설치해 ‘일괄생산시스템’을 구축했다. 정확한 지점에 부품을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효율적인 관리가 이루어졌으며, 자연스럽게 생산 비용 절감과 생산량이 증가가 이루어졌다. 자동차 생산방법에 혁신이 일어나자 포드는 판매가격을 낮췄다. 최초의 T형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던 1908년 당시 다른 자동차 회사들의 자동차 값은 평균 2천 달러 정도였다. 그러나 포드는 이때 T형 차를 825달러에 팔았다. 그 후 가격은 더욱 떨어져 300달러 미만의 가격으로 판매되기도 했다.


포드는 높아진 생산성과 수익만큼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지급했다. 포드자동차의 하루 임금은 5달러였고 동종 업계 평균은 2.34달러였다. 1914년에는 노동시간을 하루 9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였다. 이른바 ‘포드맨’이 되기 위해 우수한 인력들이 몰려들었다. 또한 포드의 노동자들은 경쟁업체들보다 두 배의 소득을 올리는 만큼 구매력이 커졌고, 결국 자신들이 생산한 차를 구매하게 되었다. 포드는 기술혁신을 통해 높은 임금을 주고 낮은 가격에 자동차를 팔아서 자동차 산업의 수요와 공급을 함께 성장시켰다. 포드의 생산 혁신은 현대 자본주의 핵심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대를 열었다.


포드를 시작으로 많은 기업들이 포드의 생산시스템을 받아들였고 대량생산의 대열에 들어섰다. 1920년대, 미국의 보통 사람들은 많은 분야의 새로운 상품을 쉽게 살 수 있는 소비사회에 살고 있었다. 대량생산은 대량소비를 낳았고, 이는 또 더 많은 대량생산을 불러왔다. 1920년대 말, 미국에는 이미 2,900만대의 자동차가 보급되었다. 자동차는 사람들의 일, 쇼핑, 여가 등 라이프스타일을 바꾸어 놓았다. 미국 기업들에 자극 받은 유럽 자동차 기업들도 포드의 생산 시스템을 받아 들였다. 자동차 기업들 뿐 아니라 건전지, 진공청소기, 제과 등의 산업에도 포드식 생산 방식이 도입되었다. 생산 방식 뿐 아니라 미국에서 시작된 소비사회 추세도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 이르렀다.


대량생산은 시대의 흐름


대량생산이 긍정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업 환경의 표준화와 획일화가 사람을 하나의 기계 부속품으로 전락시킨다는 비판도 있었다. 공산주의 및 진보정치 세력은 이를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932년에 출간된 알도우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용감한 신세계>는 대량생산이 지배하는 잔혹하고 표준화된 인정 없는 사회를 강하게 비판하였고, 노동자들 역시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속에서 노동자들은 하나의 부품처럼 인식되었고 그런 좌절감은 더욱 깊어져 갔다. 미국, 영국과 프랑스의 자동차 공장들에서는 노조에 의해 합리적인 임금과 휴가, 근무시간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그들의 최고 지도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였다. 이들에게는 노동자들의 그 어떤 도전도 용납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1917년 붉은혁명 이후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했던 소련은 어떠했을까? 당시 소련은 농업국가에서 탈피하기 위해 급격한 산업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업적 달성을 위해 무리한 생산 계획을 수시로 하달했다. 자원 배분과 생산능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전년 대비 100% 생산량 증가’, ‘당해년도 목표 초과 달성’과 같은 구호가 난무했다. 소련은 목표 달성을 위해 그들이 교활한 자본가로 폄하했던 ‘포드시스템’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공장에 포드식 생산시스템을 도입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한 소련이었지만 미국식 대량생산 방식만큼은 어떻게든 받아들여야 했다. 이들에게 당장 급한 것은 ‘인민들에게 보다 많이 분배하기 위해 많은 물건을 만드는 일’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며 세워진 ‘소련’이었지만, 이들 역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노동자들의 근본적인 삶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겉으로는 노동자와 농민을 이야기했지만 노동자와 농민은 그저 사회주의 체제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노동자들이 이룩한 모든 생산의 성과는 중앙으로 집중되었으며, 중앙에 의해 노동자들의 숫자만큼 1/n이 되어 노동자 몫으로 돌아왔다. 열심히 일한 노동자가 성과를 냈을 때 따라오는 것은 경제적인 인센티브가 아닌 ‘영웅’ 칭호와 ‘우레와 같은 박수’가 전부였다. 노동자를 위한다는 공산주의 체제의 허상은 1980년대 동구권 공산국가의 붕괴의 선봉에 섰던 폴란드 노동자들의 ‘자유노조 운동’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무기여 안녕! Good Morning to Arms!


한편, 포드식 대량생산 시스템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유럽 전역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각 나라들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규모 군비 확장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다. 전쟁과 연관된 모든 나라들이 ‘포드식 생산시스템’을 통해 살상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했다. 포드식 생산 시스템의 원조인 미국은 말한 것도 없고, 2차 대전의 전범국가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도 대량생산 체제를 도입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주만>에 나오는 전투 장면의 실제 현장은 다 이런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비행기, 탱크, 기관총과 같은 무기의 각축장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대동아 공영’을 위한 병참기지이지며 군수품 공장과 인력의 공급처 역할을 했다. 당시 조선의 어느 군수품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는 ‘일본 천황 폐하의 은혜를 입은 황군(皇軍)(?)’들이 사용할 총과 대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결국 생산 공정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대량생산 시스템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에도 편리함을 주고 말았다. 대량생산 시스템에 구축에 기여한 헨리 포드는 대량생산 시스템을 통해 살상 무기가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까? 노벨이 자신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살상 무기로 사용된 것을 보고 후회한 것처럼 혹시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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