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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영화로 읽는 통일코리아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 (2008) - 전쟁을 겪은 소년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노르웨이 라면왕 이철호


노르웨이는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쪽에 있는 산과 호수의 나라요, 해운 왕국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르웨이는 인구 500만의 단촐한 규모이지만 석유가 생산되는 산유국이면서 1인당 국민 소득 10만달러의 사회보장제도가 잘 된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국가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노르웨이에는 2명이 왕이 있다는 조크를 던지고는 한다. 한 명은 노르웨이 국왕이고 또 한 명은 '라면 왕' 이철호 씨다. ‘미스터 리’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라면왕 이철호의 이름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인간승리와 성공의 상징이기도 하다. 라면왕 이철호는 노르웨이의 유명한 요리사, 뷔페식당 사장, 식품관련 공장장 등 인간승리의 삶을 살아왔다.


머나먼 노르웨이에서 꽃핀 이철호 씨의 인생역정은 이렇게 시작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노르웨이에 가게 된 것은 6.25 한국전쟁 때문이다. 6.25 한국전쟁 당시 이씨는 열 세 살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은행에서 돈을 찾아서 가족들에게 고루 나눠주며 혹시 전쟁통에 헤어지더라도 이 돈으로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랬다. 그리고 이씨는 피난길 와중에도 밀짚모자 장사와 냉차 장사 등을 하며 연명했다. 그러다가 전쟁 중에 우연히 알게 된 미군 병사와의 인연으로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미군들의 잔심부름 하는일)로 들어갔다. 워낙 싹싹하고 성실했던 그를 미군들은 동생처럼 아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폭격을 맞아 다리 한쪽을 부상당했다 야전병원을 전전하며 수술과 치료를 거듭했지만, 다리의 상처는 더욱 악화되었다. 평소 똑똑하고 정직한 이씨를 아끼던 당시 해병대 사단장인 월터 스나이더 장군은 이씨를 좀더 좋은 의료진에게 보이고 싶어 미국 군인신문에 광고를 내 주었다. 그 광고를 보고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등지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뜻을 보내왔고, 결국 이철호는 노르웨이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노르웨이로 간 이철호는 한국의 특유의 성실과 근면함 그리고 끈끈한 인간관계로 한걸음 한걸음 성장해 나간다. 언어도 유창하지 못하고 신체적으로도 장애를 가진 이철호는 낯선 이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콤플렉스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보다 서너 배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했다. 구두 닦이로 시작해 호텔식당을 찾아가 부엌 청소를 했고 요리사가 되기 위해 요리학교에 진학해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기도 했다. 이후 이철호는 최고급 호텔 주방장과 노르웨이의 대형 빵 공장의 총지배인으로 22년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1989년부터 라면 사업을 시작하며 라면의 불모지인 북유럽에 ‘미스터리 라면’ 열풍을 일으켰다. 한국 전쟁 고아로 이국 만리에서 성실하게 살아온 그는 현재 노르웨이에서 중, 고등학교의 교과서에 실리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


6.25 한국전쟁은 이철호와 같은 10만명 이상의 전쟁고아를 낳았다. 이들 전쟁고아 대부분은 든든한 버팀 몫 없이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나마 이철호와 같이 외국으로 간 경우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배형준 감독의 영화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이러한 6. 25 한국전쟁이 낳은 전쟁고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의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두 소년의 생존기를 드라마틱하게 그려낸 일본의 유명 소설가 기타가타 겐조의 <상흔(傷痕)>을 원작으로 한다. 


세상을 뒤덮었던 폭격과 총성이 멈춘 1953년 서울. 도시는 폐허 속에서 절망과 재건의 희망이 공존하며 다시금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전쟁 중 부모 형제를 잃고 하루하루 끼니와 머리둘 곳을 찾아 수용소를 전전해야 했던 소년들이 뭉쳤다. 싸움을 잘하고 다혈질이지만 의리가 있는 종두(이완)와 또래에 비해 셈이 빠르고 명석한 태호(송창의)는 수용소에서 만나 친구가 되고, 둘이 힘을 합쳐 미군 밀수품을 훔쳐내 지옥 같은 수용소를 탈출한다. 하지만 이제 소년들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들만의 생존 의지였다. 부모의 보호도, 법도, 도덕도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에서 이러한 것들은 이들에게 사치에 불과 했다. 종두와 태완은 시장의 최대 건달 조직인 만기파를 찾아가 사정 끝에 노점을 얻어내 장사를 시작한다. 노점에서 자신들이 훔친 물건을 끼워 팔아 돈을 모은다. 어린 나이에 이미 럭키 스트라이크, 조니워커, 허쉬 초콜릿, 아이보리 비누 등 미군 밀수품을 갖고 흥정을 하며 세상을 배운다. 종두와 태호는 무조건 많이 가진 자가 살아남는다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누구보다 강한 자가 되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종두와 태호는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한다. 실제로 당시는 전쟁직후라 극심한 물자 부족과 화폐 발행량이 증가 하면서 시중 물가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하루하루 돈의 가치가 떨어졌고 상품 또한 공급이 일정치가 않아 적게 나오면 가격이 오르고 많이 나오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 반복 되었다. 이러한 시장 상황을 간파해 낸 태호는 금보다 비싼 쌀을 모아 가격이 최고로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되파는 쌀장사를 결심하고 종두와 함께 만기파 몰래 시장통 고아 소년들을 불러 모은다. 갈 곳 없이 방황하던 고아 소년들은 흔쾌히 이들의 계획에 동참하고 쌀을 모으는 과정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 그들은 서로를 돌보며 하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룬다. 한편, 주인을 무는 개는 아예 이빨을 뽑아버리는 게 상책이라 믿는 야비한 만기파의 행동대장 도철(이기영)에겐 종두도, 태호도, 그리고 사사건건 자신을 무시하며 소년들을 감싸는 명수(안길강)도 눈엣가시처럼 거슬린다. 이제 쌀도 충분히 모으고 마침내 계획의 성공을 눈 앞에 둔 순간, 모든 것을 눈치 챈 도철은 종두와 태호에게 그 동안 몰래 모은 돈과 쌀을 모두 내어 놓으라고 위협하며 종두와 태호를 따르는 고아 소년들을 납치 감금하며 이들의 숨통을 조인다. 결국 종두와 태호는 쌀의 처분하고 고아 소년들을 구하려고 하지만 이 과정에서 도철과 태호는 서로의 총에 목숨을 잃는다. 살기 위해 울수 조차 없었던 소년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 고아들을 위해 만들어진 <월드비전>과 <컴패션>


전쟁을 겪은 소년들이 울지 않았던 것은 기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소년들 뿐 아니라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그랬다. 이 와중에 우리는 해외자선단체들로부터 어느 나라보다 많은 도움의 손길을 받았다. 이들의 도움은 삶을 이어가고 새롭게 일어서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이때 전쟁이 낳은 불쌍한 고아들을 돕기위해 새로운 자선단체들이 생겨 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국제 자선단체로 잘 알려진 <월드비전>과 <컴패션>이 바로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1950년 당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밥 피어스는 영상물 제작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종군기자로 활동을 하게된다. 종군기자로서 전쟁의 실상을 알리며 활동했던 그가 만난 전쟁 고아와 전사자, 미망인들의 끔찍한 현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런 고아와 미망인들을 위해 헌신하던 한경직 목사를 피난길에서 만난 밥 피어스는 그와 함께 한국의 전쟁고아와 남편을 잃은 부인들을 돕기로 의기투합하게 된다. 이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사무실을 열고 교회를 중심으로 모금 운동을 시작한다. 우리가 아는 <월드비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로 인해 나의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라는 밥 피어스 목사의 기도는 그대로 월드비전의 정신이이 되었다. 이런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의 전쟁고아 뿐 아니라 전 세계 어린이들을 도와갔고,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책임감 있게 개발 구호활동을 펼치는 기독교국제구호개발NGO로 성장했다.


1952년 겨울. 미군 병사들을 위로 하기 위해 내한 에베렛 스완슨 목사는 이른 새벽 거리에서 인부들이 뭔가를 트럭에 싣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들이 싣고 있었던 것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어린 아이들의 시체였다. 이 모습에 충격을 받은 스완슨 목사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후 스완슨 목사는 미국 전역을 돌아 다니며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한국 어린이들의 비참한 실상을 알리며 그들의 후원자가 될 것을 호소한다. 이름 모를 수 많은 사람들의 후원으로 한국에 고아원이 세워지고 구호품이 전달된다. 또한 1:1 후원 결연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많은 전쟁 고아들의 양육을 지원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컴패션은 전세계 24개국 어린이 약 80만명을 후원하는 국제적 어린이 양육기관이 됐다.


이렇듯 월드비전와 한국컴패션은 한국전쟁고아를 돕기 위해 1950년대 초 미국인 목사에 의해 각각 설립됐다. 40여년간 받기만 하던 한국은 1991년 한국월드비전이 수혜국이에서 후원국으로 전환하면서 전기를 맞는다. 어린이 양육사업에 전념하고 있는 한국컴패션은 1993년까지 한국에 있던 본부가 미국으로 철수했지만 한국수혜자들의 청원으로 2003년 한국에 지부를 내게됐다. 컴패션의 열번째 후원국으로 다시 태어나 해외아동들을 지원하고 있고 수혜국이 후원국으로 변모한 첫 케이스가 되었다. 한국월드비전과 한국컴패션 모두 국내 보다는 해외 개발과 후원을 주 사업으로 하고 있다. 


전쟁직후 피폐하고 가난한 그리고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상황을 극복하고 성장과 발전을 이룩한 한국의 이면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지원을 해준 후원자, 봉사자, 자선단체가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은 전쟁, 가난, 질병,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곳에는 기댈곳이 없는 고아들이 있다. 좌절을 딛고 기적을 만든 우리가 봐야 할 것이 바로 이들을 보듬는 것이다. 기댈 곳이 없어 울 수 없는 소년들이 버럭 끓어 않고 함께 울어야한다. 60여년전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잘 것 없었던 ‘한반도’에 와 눈물을 흘리며 “내가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자기의 것을 내어 놓으며 과감한 실천을 했던 이들 처럼 말이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

“It's our tur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