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의 도시, 춘천(春川)
봄 춘(春), 내 천(川). ‘봄 시내’란 어여쁜 이름의 춘천은 한 지역의 지명을 넘어 젊은 날의 추억을 아른거리게 하는 도시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물 안개 자욱한 호수와 겹겹이 조화를 이루 산들이 감싸주는 춘천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기억을 선물한다. 춘천은 겉으로 보기에는 잔잔하고 평온하지만 그 이면에는 분단과 전쟁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춘천은 한반도 유일의 분단 도인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다. (북한 강원도의 도청은 원산에 있음). 한반도 지도를 위아래, 좌우로 한번 접었을 때 춘천은 거의 정중앙에 해당된다. (실제 정중앙은 춘천 바로 위 강원도 양구군 남면). 또한 한반도 분단과 동의어격 인 ‘위도 38도선’이 춘천 북쪽을 지나고 있다. 1945년 해방이후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 춘천 시내는 남한, 춘천 북부외곽과 인근 화천, 양구는 북한 지역으로 분리 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동일 생활권이었던 지역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인위적인 힘에 나뉘어졌다.
춘천은 한국전쟁 초기 치열한 격전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디딤돌의 역할을 했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 도움을 받으며 국제사회가 개입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당시 북한군 남침 작전계획의 핵심은 경기도 파주와 의정부 지역을 통해 진입한 북한 병력이 서울을 3일내에 점령하고 춘천지역을 통해 진입한 병력이 수도권 외곽에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 한국군 주력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춘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6사단 7연대에 강력한 저항으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전쟁 초기 대부분의 국군이 북한의 침입에 제대로 된 대응한번 못하고 후퇴했지만 ‘춘천’ 지역만큼은 전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3일 이상 버틸 수가 있었다. 춘천지역 전투는 북한군의 포위망 구축을 사실상 어렵게 만들었고 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 초기 춘천이 버텨준 3일은 한국전쟁의 ‘골든타임’과도 같았다. 그래서 춘천전투는 인천상륙상전, 낙동강 전투와 함께 한국전쟁 3대 전승 전투로 기억 되고 있다.
<은마(銀馬)는 오지 않는다>
춘천은 치열한 격전지였던 만큼 지역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받은 상처도 크다. 전쟁 통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이산가족이 되었고 전쟁 전후로는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도시의 분위기도 상당히 바뀌었다.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갖고 있다 보니 춘천을 배경으로 한 한국전쟁 관련 소설과 영화가 적지 않다. 1963년 여름 당시 서강대 3학년 학생이었던 번역가 겸 소설가 안정효는 영어사전 한 권과 노트 몇 권을 갖고 춘천시 서면 금산리 황면장댁을 찾는다. 여기에서 안정효는 방학 동안 장군봉 전설과 미군 부대 등 춘천의 여러 요소를 녹여 영어소설 초고를 완성했다. 이 소설은 1988년 미국에서 <Silver Stallions>란 이름으로, 국내에서는 <길쌈>이름으로 출간 되었다가 나중에 <은마는 오지 않는다>에서 다시 <은마>로 이름을 바꾸어 출간된다. 그리고 이 소설은 1991년 장길수 감독에 의해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로 만들어 진다.
이야기는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 직후 강원도 춘천 근처의 작은 마을 ‘금산리’에서 시작된다. '금산리' 마을에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가 하나 있다. 마을이 위기에 빠질 때 번쩍이는 ‘은마(銀馬, 은빛 말)’를 탄 장군(將軍)이 홀연히 나타나 사람들을 구해준다는 전설이다. 평온하던 마을은 전쟁 통에 혼란에 빠지게 된다. 어느날 밤 이야기 속 주인공 언례(이혜숙)는 마을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이 사건으로 마을 사람들은 동정보다는 그녀를 멸시하고 따돌리고 심지어 불결하게 생각한다. 남의 집 일을 해주며 근근히 남매를 키우는 20대 후반의 과부 언례는 수치심과 멸시로 죽고 싶은 심정이나 어린 자식들 때문에 죽지 못한다. 그러던 중 강 건너 가운데 섬 ‘중도’에 미군 부대가 진주하게 되고 그들을 따라 양색시들이 부대 주변에 기지촌을 형성하고 머물게 된다. 생계가 막막한 언례는 최후의 수단으로 기지촌내에 용녀(김보연)와 순덕(방은희)이 일하는 클럽에서 일하며 생계를 연명하게 된다. 금산리 황훈장(전무송)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언례가 양색시가 됐다는 사실에 더욱 불쾌해 한다.
한편 인근 미군 부대로부터 미군 문화가 유입하면서 수백년간 지켜오던 마을의 질서는 붕괴되기 시작한다. 어린 아이들은 미군 부대 쓰레기장을 뒤지거나 파괴적인 전쟁놀이를 즐기기 시작했고 언례의 아들인 동네 친구 만식도 따돌리게 된다. 그리고 언례가 일하는 클럽 안을 훔쳐보는 것이 아이들의 큰 재미로 등장한다. 이를 알게 된 만식이 마을 아이들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수제파이프 권총을 쏘게 된다. 이로 인해 만식은 두손가락이 잘려나가면서 혼절하게 된다. 총소리에 미군이 출동하게 되고 아이들의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잠시 후 손가락이 잘린 만식을 안고 나타난 언례와 마을 사람들이 심한 충돌을 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은 유엔군에게 불리해지면서 미군부대가 철수하게 되고 따라서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피난을 떠난다. 언례와 아들 만식도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며 마을을 떠난다.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은마를 탄 장군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은마는 오지 않았지만
금산리 사람들에게 ‘은마 탄 장군’은 곧 구원자 메시아와 같은 존재였다. 마을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 속에 탄식하였건만 메시아가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가 않았다. 이 소설이 나왔을 때 ‘반응 없는 메시아, 은마’를 기독교의 메시아에 대비 시켜 해석하는 글들이 제법 있었다. 메시아론을 부정하는 이들은 메시아론이 은마 처럼 전설일 뿐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의 시간과 하늘의 시간은 다른 법. 기다려도 오지 않는 은마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과 로뎀나무 그늘 아래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성경 속 엘리야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분명 한국전쟁 중 춘천 금산리 사람들에게 은마는 오지 않았다. 60여년이 지난 금산리와 춘천의 오늘은 어떨까? 전쟁의 상흔도 두세대를 넘기면서 '힐링 (healing)'의 기운을 고조 시키고 있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소설과 영화속의 이방문화인 된 미군과 미군부대는 이미 2005년 춘천을 떠났다.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 캠프 페이지(Camp PAGE)는 지역사회에 긍정과 부정의 모습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긍정적인 모습으로는 춘천이 중소도시 치고는 비교적 국제화된 서구 문물을 빨리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미군들은 지역민들에게 영어교육, 부대 내 교회 및 복지시설 개방 등을 통해 지역 사회에 밀착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각종 자연재해 발생하면 인력 및 장비지원등을 아끼지 않았다. 춘천 미군 부대는 지난 1983년 한중 관계에 있어 기념비적인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적대국가였던 한국과 중국은 처음으로 외교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서로를 ‘남조선’과 ‘중공’이 아닌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정하면서 9년뒤인 1992년 한중 수교의 물꼬를 트게 된다.
하지만 미군 부대는 지역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미군들을 대상으로 하는 퇴폐 업소들이 일명 기지촌을 형성하며 영업을 했고 미군들이 한국 여성을 성희롱 하는 사건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미군들이 폭력 사건을 일으켜도 한국 경찰이 아닌 미군 헌병에 넘겨졌기에 이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미군부대에서 비밀리에 각종 음란물과 군용 생필품 등이 빼돌려져 시내의 허름한 시장 뒷골목에서 유통되기도 했다.
미군이 떠난 2005년 이후 춘천은 지금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춘천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미군 부대가 있던 자리는 수십년간 오염된 환경에 대한 치유를 마치고 그 소유권이 국방부에서 춘천시로 넘어 왔으며 친환경 개발을 염두에 두고 발전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소설과 영화속에서 미군 부대가 있던 가운데 섬 중도는 세계 3대 테마파크인 레고랜드를 유치해 2015년 개장을 목표로 동아시아 관광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지역에 있는 강원대, 한림대 등에는 30여개국에서 1,000여명의 유학생들이 와서 한국을 배우고 있다. 또한 영화속 주인공 언례의 마을인 서면 금산리는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벗어나 어린이 애니메이션 ‘구름빵’ 등을 만든 애니메이션 산업 단지로 거듭 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금산리를 비롯한 춘천은 외부로 부터 유입된 이방 문화에 상처 받고 고난을 당한 과거 속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지역이 새로운 가치들을 보고 배우고 즐기기 위해 찾는 외부에서 찾아오는 역동적인 곳이 되어가고 있다. 실제 미군 부대 있었던 자리와 영화 속 미군 부대가 있던 중도 사이에는 새롭게 전철역으로 단장 된 춘천역이 있다. 춘천역은 지금은 종착역이지만 여기에서 동쪽으로 철도를 놓으면 동해 바다로 이어지고 북쪽으로 철도를 놓으면 철원에서 경원선을 만나 러시아로 이어진다. 그리고 남쪽으로 이으면 원주에서 중앙선과 만나 부산으로 갈 수도 있다. 길이 열리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 역시 그 반경이 넓어진다. 닫힌 공동체 벗어나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며 말이다.
언례의 자화상이 폐쇄된 공동체 속 상처 받은 약자의 모습이었다면 앞으로 우리가 이야기 할 언례는 열린 공동체 속에서 역경이 오면 이를 과감히 이겨나가는 당찬 자유인이었으면 좋겠다.
1950년 춘천. 사람들에게 기다렸던 은마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때 그 곳은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의 활기찬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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