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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혁신/사회적기업(SE)

가난없는 세상을 위해 헌신한 무하마드 유누스

산업혁명을 거치며 서유럽국가들은 경제의 규모의 커지면서 생산에 필요한 원료와 생산된 제품을 소비할 곳을 찾아 나섰다. 영국은 면공업에 필요한 원료를 공급받고자 그리고 생산된 면제품을 다른 나라에 판매하고자 자유 무역을 지지했고, 모든 나라에 자유 무역을 확대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자유무역이 확대되고 세계 경제는 조금씩 통합의 길로 들어섰다. 영국을 위시한 산업화된 나라들은 경쟁적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 식민지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1914년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의 85%가 식민지화되며 제국주의 경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전후 세계질서가 재편 되면서 식민지를 청산하며 독립하는 나라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독립은 외형적으로만 독립이었지 독자적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 없는 나라가 대부분 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여건도 미비했다. 서구 선진국들로부터의 대규모 경제원조와 각종 개발에 대한 협력 프로그램이 있긴 했지만 성숙하지 못한 정치·경제 시스템으로 인해 효율적인 프로그램 운영이나 효과적인 결과들을 내지 못했다. 잘사는 나라는 더욱 잘살게 되고 못사는 


나라는 더 못살게 되는 국가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만 더 심화 되었다.

그러던 중 1960년대 이후 서구 사회에서 인권, 여성, 평화와 관련된 이슈가 본격화 되고 시민세력이 형성되면서 제3세계 빈곤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선진국에 유학을 온 제3세계 엘리트들중 귀국하여 빈곤 문제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의 설립자 무하마드 유누스(Muhamad Yunus)다.


방글라데시는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다가 1947년 파키스탄으로 독립하고 1971년, 오늘날의 방글라데시로 독립한 가난한 나라들 중 하나다. 무하마드 유누스는 1940년 방글라데시 제2의 도시 치타공 시에서 태어났다. 치타공 대학 졸업 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 반더빌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후 치타공 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있던 1976년 어느 날, 가난한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중 대학 주변 시골마을 주민 42명에게 주머닛돈 27달러를 빌려 주는 것을 시작으로, 1983년 방글라데시 말로 ‘마을’이란 뜻의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였다. 가난한 사람은 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수 없다는 통념을 깨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을 설립한 것이다.


유누스 총재와 그라민 은행은 ‘신용은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라는 신념으로 제도 금융으로부터 소외되었던 방글라데시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담보나 보증 없이 소액 융자인 마이크로크레딧 프로그램을 시행하며, 지난 30여년 간 2007년까지 710만명에게 61억 4,000만 달러를 대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라민 은행의 소액 융자 프로그램은 전세계 60여 개국에도 도입되어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가난 없는 세상을 향한 유누스 총재의 도전과 성취는 세계 지도자들과 언론의 호응과 찬사를 받았다.

그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1984년)과 세계식량상(1994년)을 수상하였고, 1995년에는 아시아 위크 지가 뽑은 '위대한 아시아인 20인'에 선정되고 2006년에는 빈곤 퇴치를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또한 2008년 타임지에 20세기 창조적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실리기도 했다.


흔히 경제학자들을 가리켜 냉철한 머리,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이라고 말한다. 경제학자기도한 무하마드 유누스는 여기에 하나를 더 붙일 수 있다. 그는 냉철한 머리, 따뜻한 가슴, 움직이는 손과 발이는 있는 경제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