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1895-1971) 박사는 서양문물에 눈뜬 아버지의 영향으로 1904년 9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 건너간 유일한은 네브래스카주에서 초중고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마친 유일한은 미시간대 상과계열에 입학하였고, 그는 한국인 자유대회에서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결의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는데 평생 그 결의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1920년 대학을 졸업한 유일한은 세계적 전기회사인 GE에 동양인 최초의 회계사로 취직했고 1년 뒤 동양현지 총책임자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업체인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하였고, 1925년에는 그를 특별히 아꼈던 서재필과 유한양행(New Il-han & Co.)을 설립하였다.
1926년 서울에 유한양행을 설립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를 경영하고 있을 때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이 가난과 질병에 시달린 뿐 아니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고 이를 해결하려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일한은 동포들의 절실한 필요를 채운다는 뜻을 가지고 유한양행에서 결핵약, 진통소염제(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만들어 판매했다. 유한양행은 1933년에 그간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였던 안티푸라민은 회사의 첫 번째 개발 제품이 되는 개가를 올렸다. 소아과 의사인 미국인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에서 의약품이 극도로 부족해지자, 직접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았다.
유일한은 성실한 세금납부는 물론 투명경영과 윤리경영 실천에 있어서도 모범을 보였다. 실례를 들면, 모르핀 판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간부에게 회사에서 당장 나가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1970년 유한재단을 설립하여 직업교육기관인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세웠다. 1971년 별세하기 전 1만 불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인 손녀의 학자금으로 쓰도록 하고 나머지는 모두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별세 당시 낡은 구두와 아끼던 몇 가지 양복이 그의 재산의 전부였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는 신념과 말을 솔선수범함으로써 그 당시 사회적 통념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도덕적 엘리트로서 수행하였다. ‘부자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한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유언장에 자신의 소유주식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분명히 밝힌 유일한은 한국 사회에서 기업 사회공헌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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