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여는 글에서 소개 되었던 조사이어 웨지우드의 도자기가 영국의 작은 도시를 넘어 영국 왕실과 세계 명품 도자기로 발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경제적 상황이 ‘산업혁명’ 이라는 인류의 새로운 경제적 전환점 이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의 밑바탕이 된 산업혁명은 조사이어 웨지우드가 태어나고 활동했던 18세기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도자기 사업가이자 세계 최초의 브랜드 마스터인 조사이어 웨지우드와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스미스 (1723~1790)는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다.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을 발표한 1776년은 조사이어 웨지우드가 한창 왕실에서 사용하는 ‘여왕의 도자기’와 신기술에 의해 새롭게 디자인된 자스퍼 도자기로 한창 명성이 높아질 때였다. 아담 스미스는 생전에 나름 부유한 환경에서 살았으므로 당시 최고의 명품이었던 ‘웨지우드’의 찻잔에 차를 담아 마셨는지도 모른다.
아담 스미스와 웨지우드가 공유했던 산업혁명의 시대는 16세기 말부터 서서히 시작된다. 1585년 세계 최강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며 바다를 점령한 영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각국에 식민지를 건설해 나갔다. 그 결과 영국 상품에 대한 해외시장은 영국의 국내시장 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영국 제품에 대해 급속히 증가하는 해외 수요로 말미암아 신석기 혁명 이래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증기기관이 발전되고 이를 바탕으로 각종 산업 기계들이 발명 되면서 직물산업, 철강산업, 석탄 광업이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생산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나 기존의 수공업적인 생산방식에서 공장제 기계공업이 시작되었고 자본가적 제조업자, 상인, 임금 노동자와 같은 오늘날의 산업 계층 구조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시장이 형성 되고, 오로지 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공급자(기업)이 존재했고 그 기업에서 일하면서 오로지 임금에 의해 생존이 가능한, 그리고 그 임금으로 기업의 생산물 시장에서 구입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양산 되었다. 이렇게 생산자와 수요자가 명확히 구분되면서 근대 자본주의 시장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소외 계층의 출현
산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에게는 많은 혜택이 주어졌고, 사람들에 따라 그 혜택에 대한 반응 정도는 달랐다. 더욱 더 많은 경제적 부를 누리게 된 유럽의 중상류층 사람들은 경제 발전이 유익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생산기술의 발달과 높아진 경제 수준으로 새로운 제품들을 구매 할 수 있게 되고 교통수단이 발달 하면서 여행하기도 편리해 지면서 중상류 사람들의 새로운 문명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숙련된 장인들이 월급 받는 노동자로 전락하고, 매연으로 가득찬 공기는 건강에 해로운 장소로 변하는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산업화의 진행으로 사회 전체의 부는 향상 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하루에 12시간 일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심할 때는 15시간 이상씩 일해야 했다. 받는 임금으로는 최저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소수의 부유한 자본가와 대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대립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초창기 자본가와 노동운동가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영국 정부는 자본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단결금지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단결을 저지했고 노동자들은 러다이트 운동이라 불리는 기계 파괴행위를 하며 맞섰다. 노동자들은 새롭게 발명된 기계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만드는 공공의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기계 파괴 행위를 하는 노동자를 사형에 처하게 하는 법까지 만들었다. 산업혁명이라는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경제발전의 이면에는 이렇게 새로 생겨난 계층간의 대립과 갈등, 반목이 있었다.
산업혁명이후 극도로 양극화된 계층구조를 보며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노동자들에게 보다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생산성 향상에 지름길이라는 지론을 갖고 실천에 옮겼던 당시 기준으로는 이상한(?) 자본가였던 로버트 오웬(1771~1858)와 생산자 단체를 결성한 프랑스의 샤를르 푸리에 (1772~1837)가 있었다. 그리고 공산주의 사상을 창시한 칼 마르크스(1818~1883)도 이 시대에 과학적 공산주의를 이야기 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기업인의, 기업인에 의한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
산업혁명 이후 생긴 새로운 소외 계층에 대한 관심과 대안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은 주로 노동운동가,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다.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평행선을 달리던 기업가(자본가)-노동자들의 대립과 갈등의 관계에도 조금씩 변화가 왔다.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의 기업안의 운명공동체이고 기업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책임과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 기업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이익만 쫓던 근시안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기업이라는 공동체와 사회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를 쓰자면 기업의 사회공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개념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기업 사회공헌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바로 초코렛으로 유명한 영국의 캐드버리였다.
<사회적 책임을 다한 초코렛 명가, 캐드버리 가문>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모순을 보며 과학적 공산주의를 고민하던 시절 자본가도 노동자도 하늘 아래 평등한 사람이라는 비전을 가진 기업이 있었다. 그 기업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과감한 투자를 했다. 바로 <캐드버리>기업이다.
오늘날 미국의 허쉬(Hershey)와 함께 양대 초콜릿 브랜드로 불리는 캐드버리(Cadbury)는 1824년 퀘이커교도 캐드버리에 의해 시작되었다. 캐드버리는 처음에 차와 커피 무역을 주 사업으로 하였으나 열대 식물인 코코아에서 새로운 사업의 가능성을 발견한 후 코코아 음료, 초콜릿 가공식품 등으로 사업의 영역을 넓혔다. 존 캐드버리가 초콜릿을 사업 아이템으로 정한 이유는 간단한다. 술은 사람을 가난하고 궁핍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술을 마시는 것이 자신의 윤리적인 가치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코코아 음료를 생산해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존 캐드버리의 아들 조지 캐드버리(1839~1922)는 1861년 아버지의 사업체를 이어받아 코코아·초콜릿 제조회사인 캐드버리 브러더스사로 크게 번창시켰다. 사회개혁가이기도 한 그는 작업환경의 개선, 주택공급, 도시계획 등을 시험적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1879년 조지 캐드버리 형제는 그들의 회사를 산업도시인 버밍엄에서 전원지역인 우스터셔로 옮겨 '본빌'(지금의 버밍엄에 속함)이라고 불렀다. 본빌에서 그들은 사립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는 한편 작업환경을 당대 최고의 수준으로 개선했다. 1894년부터 조지 캐드버리와 그의 건축기사 알렉산더 하비는 노동자들의 주거지를 지었는데, 이 주거지는 노동자 계급의 주택치고는 특이하게 넓은 정원과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는 여러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1900년경 캐드버리가 그의 땅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본빌 빌리지 트러스트(Bournville Village Trust)’를 세웠다.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캐드버리의 실험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으나 19세기 후반의 다른 기업들과 비교했을 때 그의 이러한 노력은 혁명적 발상이었다. 캐드버리는 기업이 존재 이유가 단지 경영진의 이익만이 아닌 같은 기업을 둘러싸고 있는 노동자와 지역사회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위해 그 책임을 다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록펠러와 카네기>
경제학의 시카고학파로 유명한 미국 시카고대학 캠퍼스 내에는 이 대학의 설립자 존 록펠러를 기념하는 교회인 ‘록펠러 채플’이 있다. 그리고 철강의 도시 피츠버그에는 철강왕 카네기가 멜론대학과 합쳐 설립한 카네기멜론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의 공대는 미국 대학순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며 특히, 컴퓨터공학 분야는 최상위권을 자랑한다.
세계 최고의 지식경쟁력을 자랑하는 미국 대학의 상당수가 성공한 기업인에 의해 설립되거나 이들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운영 되고 있다. 이렇게 성공한 기업인들이 교육, 문화, 복지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빠른 산업화를 이루어 나갔다.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육성 정책과 새로운 기회를 찾아 유럽으로부터 이주해 오는 값싼 노동력은 산업화를 진행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석유산업에 진출한 록펠러를 시작으로 철강산업의 카네기, 철도산업의 밴더빌트, 자동차산업의 포드, 금융산업의 모건등 이전에는 상상할수 없었던 어마 어마한 부를 거머쥔 부호들이 탄생했다.
당시 성공한 기업인들은 사업을 통한 이익 극대화에만 사회봉사나 재산의 사회 환원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록펠러와 카네기는 이러한 ‘구두쇠형 졸부’들과는 다르게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공헌 사업에 참여 하게 된다.
록펠러는 시카고대학을 창립하고 록펠러재단을 설립했다. 록펠러재단은 설립 이후 지금까지 기아근절, 인구문제, 대학교육, 기회균등 관련 사업을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카네기 역시 재단을 설립하여 교육과 문화관련 사업을 집중 지원하였다. 특히, 카네기는 저서 부의 복음에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를 위해 돈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현재 뉴욕 맨하튼에는 록펠러재단이 세운 록펠러센터와 카네기문화재단에 의해 건설된 카네기홀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들의 사후에도 굳건히 서있다. 록펠러와 카네기의 경영철학 (불굴의 기업가 정신, 자선문화 정착)은 세계 기업사에서 미국 경제가 주역이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 했다.
<유일한 -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1895-1971) 박사는 서양문물에 눈뜬 아버지의 영향으로 1904년 9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 건너간 유일한은 네브래스카주에서 초중고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마친 유일한은 미시간대 상과계열에 입학하였고, 그는 한국인 자유대회에서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결의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는데 평생 그 결의문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1920년 대학을 졸업한 유일한은 세계적 전기회사인 GE에 동양인 최초의 회계사로 취직했고 1년 뒤 동양현지 총책임자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업체인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하였고, 1925년에는 그를 특별히 아꼈던 서재필과 유한양행(New Il-han & Co.)을 설립하였다.
1926년 서울에 유한양행을 설립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를 경영하고 있을 때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이 가난과 질병에 시달린 뿐 아니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31) 많은 것을 알고 이를 해결하려는 뜻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일한은 동포들의 절실한 필요를 채운다는 뜻을 가지고 유한양행에서 결핵약, 진통소염제(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만들어 판매했다. 유한양행은 1933년에 그간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였던 안티푸라민은 회사의 첫 번째 개발 제품이 되는 개가를 올렸다. 소아과 의사인 미국인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에서 의약품이 극도로 부족해지자, 직접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았다.
유일한은 성실한 세금납부는 물론 투명경영과 윤리경영 실천에 있어서도 모범을 보였다. 실례를 들면, 모르핀 판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간부에게 회사에서 당장 나가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1970년 유한재단을 설립하여 직업교육기관인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세웠다. 1971년 별세하기 전 1만 불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인 손녀의 학자금으로 쓰도록 하고 나머지는 모두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별세 당시 낡은 구두와 아끼던 몇 가지 양복이 그의 재산의 전부였다고 한다.
더욱이 그는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는 신념과 말을 솔선수범함으로써 그 당시 사회적 통념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도덕적 엘리트로서 수행하였다. ‘부자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한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유언장에 자신의 소유주식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분명히 밝힌 유일한은 한국 사회에서 기업 사회공헌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2. 새로운 나눔, 새로운 자본주의
새로운 나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기업의 사회공헌은 1960년대까지 현금․현물 기부, 공익재단, 병원․학교 같은 공공시설 건립의 형태로 이어져왔다. 영국과 미국의 기업가들이 시작한 사회공헌 사업의 모델은 전 세계 기업가들에게 확대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이후 단순한 기부 형태의 기업의 사회공헌을 넘어 환경과 사회를 고려하며 기업 경영을 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개념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경제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을 동시에 실현하고 하는 사회적 기업이 등장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경제학 교수인 무하마드 유누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출해 주는 빈민은행은 그라민은행을 세워 새로운 금융업을 시작했고 호주의 백만장자 데이비드 부소는 자신의 전재산을 신탁기금에 맡기고 제3세계의 가나한 이들을 위한 대안 기업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미국의 빌레이튼은 맥킨지 컨설턴트와 환경부 고위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가난한 나라의 사회적 기업가를 돕는 아쇼카 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선진국에서도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아닌 이익의 전부를 사회에 재투자 하는 사회적 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사회적기업에 공헌 사람은 기업가가 아닌 영화배우였다.
미국 배우 폴 뉴먼이 2008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와 ‘스팅’을 통해 한국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한 그는 50여년 간 총 51편의 영화와 4편의 브로드웨이 연극에 출연했으며 1986년에는 ‘컬러 오브 머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세상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든 건 영화를 통해 보여준 수려한 외모와 인상적 연기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 식품업계에 ‘뉴먼스 오운(Newman’s Own)’이라는 아주 특별한 회사가 있다. 몸에 해로운 첨가제나 방부제를 전혀 쓰지 않고 100% 천연재료로 샐러드 드레싱이나 스파게티 소스 등을 만드는 걸로 유명하다. 바로 폴 뉴먼이 1982년에 설립한 회사인데, 꾸준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회사를 더 유명하게 만든 건 회사의 수익이 몽땅 자선사업에 쓰인다는 사실이다. 매년 12월이면 수익금 전체가 자선기금으로 전입되고 회사는 새해 첫 날 은행에서 자금을 대출받아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용된 돈이 지금까지 모두 2억5000만달러(약 3000억원)나 된다.
뉴먼은 난치병을 앓는 어린이들을 위해 미국 내 31개 주와 세계 28개 나라에 캠프를 설치해 절망 속에 허덕이는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했을 뿐 아니라,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 CNN 방송사의 설립자 테드 터너, 빌 게이츠의 아버지인 게이츠 주니어 등 미국의 잘 나가는 갑부들과 더불어 ‘책임지는 부자’라는 단체를 만들어 가진 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몸소 실천하기도 했다.
공익마케팅으로 만드는 새로운 자본주의
공익마케팅이 세계 최초로 시작된 1983년의 미국은 모든 면에서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언론에서는 연일 일명 쌍둥이 적자인 나라의 무역적자, 재정적자의 심각성이 경제면 톱뉴스를 차지했고 재정적자를 탈출하기 위해서 복지 예산을 줄이는 긴축 정책이 펼쳐졌다. 실업이 늘어나고 외부의 지원 없이 자립이 힘든 저소득층의 비율이 늘어났다.
공익마케팅이 처음 시작된 뉴욕은 맨하탄 빌딩 숲의 겉모양만 화려했을뿐 도시 자체가 치안불안과 빈약한 도시 재정으로 제대로 관리 조차 힘든 힘겨운 상태였다.
공익마케팅은 나라가 어렵고 도시가 불안한 상태에서 기업이 사회에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뿌린것이다. 그것도 미국의 상징적인 도시, 상징적인 기념비에서 말이다.
1983년 미국의 경제 상황이 좋고 뉴욕시의 도시 환경이 나쁜지 않았다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카드는 자유의 여신상 보수 사업을 벌였을까? 역사에 가정법은 없지만 공익마케팅이란 명제 앞에 한번 집고 넘어가볼 필요성이 있다. 어떻게든 참여는 했겠지만 고객들의 반응은 그렇게 폭발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은 일이긴 하지만 왜 그것을 기업이 해야 하는냐 그것은 공공기관이 할 이라고 대부분의 고객들이 냉소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공익마케팅이 가장 활성화 되어 있는 나라는 미국과 영국이다. 이 두 나라는 지난 30여년동안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주도했던 나라들이다. 그 이전 정부가 했던 복지의 영역을 기업이 일정부분은 떠 맡을 밖에 없게 되었고 기업을 그것을 마케팅의 틀을 활용하여 기업의 경영전략의 큰틀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진행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복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 정부가 다 감당하기 벅찬 상태에서 일정 부분 기업들이 감당하는 부분이 커지고 자연스레 기업의 경영전략과 연계된 사회공헌, 공익 마케팅으로 확대되고 있다.
세계경제가 갑작스레 천지개벽 하지 않는다 당분간 이러한 기조의 정책틀을 유지가 될것이다. 그만큼 공익마케팅은 이제 이질적인 마케팅에서 벗어나 자연스런 마케팅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마 당분간 이렇게 흘러 갈것이고 경제가 발전 하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 질수록 기업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은 더욱 커질것이다.
기업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 앞에 공익 문제에 전략적인 접근을 할 필요성이 있다. 사회 구조를 파악해 사업과 사회문제에 대한 대안을 기업 전략에 담아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1회성 이벤트가 아닌 5~10년 뒤를 바라보는 넓은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갑과 을의 관계로만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함께 가는 파트너쉽을 가져야 한다.
공익마케팅은 ‘나’만의 욕구와 필요를 채우는 마케팅을 뛰어 넘어 ‘우리’의 욕구와 필요를 채우는 마케팅으로 거듭남의 과정을 거쳤다. 지금 지구촌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자본의 키워드는 바로 ‘우리’(We)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움직이며 동시에 자본주의는 ‘우리’를 위해 공헌하는 공생․협력의 패러다임이다.
공익마케팅은 분명 새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역할을 더욱 커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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