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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혁신

공정무역의 기원을 찾아서 - 노예들이 만든 서인도 제도산 설탕 불매운동을 펼친 혁신운동가들


노예폐지운동은 공정무역과 연관이 있다?

평생을 노예해방과 사회의 잘못된 악습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한 영국의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에는 이러한 장면이 나온다. 번번이 노예무역 폐지(안)를 의회에 제출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좌절한 윌버포스는 한 여인을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새 힘을 얻게 된다. 이 여인은 자신의 노예들이 만든 설탕 불매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고, 조사이어 웨지우드가 만든 배지를 차고 다닌다고 말해 윌버포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예들이 생산한 서인도 제도 설탕을 먹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노예무역 폐지 운동가들은 조사이어가 만든 ‘Am I not a man and a brother?(저는 사람이 아니고 형제가 아닙니까?)' 라고 쓰여 있는 배지를 차고 다녔는데, 이 여인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윌버포스가 이 여인과 밤을 새며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진행이 된다.

두 사람의 로맨스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노예무역 및 노예제도 폐지라는 같은 관심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사람은 의회에서 정책과 제도로 다른 한 사람은 설탕이라는 경제적인 매개체로 말이다.


노예와 설탕의 상관관계

현대 사회에서는 노예제도가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용인되지 않지만 200여 년 전에는 아프리카나 남미에서 사람들을 사서 유럽이나 미국으로 데려와 어떠한 인권도 보장하지 않고 소유물처럼 관리하는 것에 대해 법적 윤리적 제약이 없었고, 이에 대해 어떤 문제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의 무역 형태를 보면 대서양을 가운데에 놓고 유럽과 아프리카, 북중미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이 이루어졌다. 영국에서 직물, 총, 철물, 술 등을 싣고 출발한 배가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물건 등을 내리고 노예 매매상으로부터 노예를 인계 받아 싣고 북중미의 동인도 제도로 향하게 된다. 이때 노예들은 대부분 노예가 되고 싶어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 아니라 납치, 강제 인신매매 등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들이었다. 배에 실린 노예들은 북중미의 서인도 제도로 이동하게 되고 서인도 제도에 도착한 노예들은 경매를 통해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에 넘겨져 주로 농장에서 일하며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설탕, 커피, 담배 등을 재배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말이다.

노예를 내려놓은 배는 노예들을 생산한 작물들을 가지고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상인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남겨다 주는 삼각 무역이었지만 끌려간 노예들에게는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고통스런 삶의 시작이었다.

노예들의 삶은 끊임없는 노동의 연속이었다. 하루에 18시간 이상 휴일도 없이 일했다. 자메이카의 경우 노예의 60% 이상이 설탕 재배 노동에 동원되었는데. 6살 이하의 어린이와 거동하기 불편한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다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다.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 국적의 상선에서만 340만 명 이상의 노예가 거래되었다. 당시 노예무역은 프랑스, 스페인 등도 하고 있었고 거래된 노예의 총합은 천만 명이 넘었다.


영국의 양심들 노예제도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영국에게는 부와 노동, 소비재 상품 생산에 있어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왔지만 영국의 양심적인 식자층들 사이에서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으로 노예무역 금지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사람들은 퀘이커교도들이었다. 이들의 ‘신(神)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신조와 노예무역은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의회 청원과 출판, 캠페인 등을 통해 노예무역의 부당함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러한 노력은 퀘이커교도들뿐 아니라 종교단체와 사회개혁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서서히, 하나 둘 틀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합류하게 된 사람이 노예무역 및 노예해방을 주장한 영국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와 그가 속한 클래펌 공동체다.

노예무역 금지와 노예해방의 기치 아래 모인 이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1807년에 노예무역 금지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1833년에는 노예제도 자체가 폐지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공정무역의 닻을 올리다.

윌버포스가 주축이 되어 1791년 의회에 제출된 노예무역 폐지안이 부결된 이후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게 된다. 이 운동은 당시 영국의 최대 수입 품목 이었던 서인도제도의 노예들이 생산한 설탕을 불매하는 운동이었다.

설탕은 서인도 제도의 노예 노동력으로부터 생산되고 있었고 노예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있기에 노예무역이 줄어들지 않는 결론을 내린 운동가들은 이러한 구조를 개선시킨다면 노예무역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행동에 임하게 된다.

1791년 윌리엄 폭스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은 노예들에 의해 생산된 서인도 제도의 설탕대신 노예들이 생산하지 않는 동인도 지역의 설탕을 대체 구매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게 된다. 이 운동으로 몇몇 지역에서는 서인도산 설탕 소비가 1/3 이상 줄어들었고 2년간 인도산 설탕의 구매가 10배 이상 늘어났다.

이는 오늘날의 소비자 권리 운동의 시작이고 공정무역의 실질적인 출발점이기도 하다. 서인도제도산 설탕 불매 운동은 1807년 노예무역 폐지에도 기여하게 된다.

노예에 의해서 생산된 설탕에 대한 불매 운동은 1820년대 다시 한 번 일어나게 되는데 이번에는 영국과 영국 식민지 지역의 노예제도 자체에 대한 폐지 운동을 기치로 일어나게 된다. 다시 한 번 노예를 이용하여 생산된 설탕을 판매하는 가게들에 대한 불매운동이 펼쳐졌고 몇몇 무역업자들은 자신들이 들여오는 설탕이 노예와는 무관한 설탕이라는 라벨을 붙이게 된다.

라벨을 붙임으로써, 설탕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에게 자신들의 설탕은 노예랑 상관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라벨이 오늘날의 공정무역(Fair Trade) 라벨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 번째 서인도 제도산 설탕불매 운동은 노예제를 반대하는 여성 단체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전개 되었는데 여성 운동원들은 가가호호 방문하며 홍보 팸플릿을 뿌렸고 영국 정부에도 서인도 제도 설탕 대신 동인도 제도 설탕을 수입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 운동은 1833년 영국에서의 노예제 폐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두 번째 설탕 불매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교사 출신의 엘리자베스 헤이릭이라는 여성이다. 헤이릭의 설탕 불매 운동의 원리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비즈니스 행위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통해 생산자가 용인할 수 없는 행위를 했다는 정보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하게 되면 해당 생산자나 기업은 판매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 고민하다가, 일단 비판을 잠재우고 상업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형태를 바꾸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사회를 위해서도, 비즈니스를 위해서도 유익했다. 18세기에 처음 출현하여 전세계에서 산발적으로 시행된 소비자 운동은 윤리적 소비를 통해 나쁜 기업을 착한 기업으로 바꾸고자 여러모로 노력해 왔다. 최근의 공정무역운동을 생각해 보면 시대적 배경과 산업의 유형만 달랐지 그 속성은 비슷하다.

오늘날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경제 불균형을 극복할 대안으로 꼽히고 있는 공정무역은 이미 200여 년 전 영국에서 혁신적인 생각을 갖고 사람들에 의해 실천되었다. 하늘 아래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을 갖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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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2009년에 출간된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전병길 고영 공저, 꿈꾸는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www.yes24.com/24/goods/3323004 을 참조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