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식민치하에서 갓 해방된 우리는 ‘분단’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고, 준비는 더더욱 하지 못했다. 단지 일본이 패망하고 독립된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 줄 몰랐고, 미국과 소련은 한민족이 주체가 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기 전 잠시 이 땅에 주둔하며 일본의 잔재를 청산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틀렸고 좌익과 우익, 친일파와 독립 운동가들의 생각이 달랐다. 순진한 백성들은 좌익이냐 우익이냐 노선을 확실할 것을 요구 받았으며, 이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선동적인 정치문구를 접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중국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하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정부의 귀국이 아닌 개인자격의 귀국이었다.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신탁통치 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라 안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데모의 분위기로 휩싸였다. 좌우익의 대립이 극해지자 곳곳에서 테러와 파업, 동맹휴업, 군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송진우, 백관수, 여운형, 김구와 같은 지도자들이 암살 되었다.
북한에서는 인민이 주인이 되는 ‘인민공화국’을 세운다는 목적으로 지주들의 땅과 재산이 몰수 되었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 와중에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하여 분단이 아닌 단독정부 수립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에게는 남북 분단의 현상 유지에 대한 의지만 있었을 뿐 우리 민족이 그렇게 바라던 단독정부 수립을 통한 통일에 대한 의지는 없어 보였다.
결국 남과 북은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절차에 들어간다. 1945년 10월, 북한에서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만들어지며 김일성이 책임비서가 되어 소련 군정에 참여하게 된다. 나중에 이 조직을 바탕으로 북한 정부와 조선로동당이 만들어진다. 남한은 좌우익의 첨예한 대립 속에 결국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민의를 수렴한 ‘대한민국’ 헌법이 만들어지고 민주정부가 수립된다.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한 직후인 1948년 5월 14일, 북한은 남한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남쪽으로의 전기 공급을 중단 시켜 버렸다. 일제강점기 대단위 공업지대가 함경도 지역 등에 조성되면서 공업단지에 공급될 전기 에너지 생산 시설도 원활한 수급을 위해 그 지역에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해방 이후 국토는 분단되었지만 남한이 북한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공급해 주고, 북한은 남한에 전기에너지를 공급하는 물물교환의 형식으로 ‘산업의 동맥’인 전기에너지를 공유했었다. 하지만 북한의 일방적인 단전 조치 이후, 전체 전기에너지 수요의 70% 가량을 북에 의지하고 있던 남한은 전기 부족으로 큰 혼란을 겪었으며 남북은 경제공동체의 마지막 끈인 전기에너지 공유가 없어지게 되어 ‘국토 분단’과 ‘사상 분단’ 이후, ‘경제 분단’의 과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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