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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기업이준비하는통일

북한지역에 대한 일본의 관심


19세기말 개항이후 일본 상인은 대개 몰락한 상인이나 무사층 출신으로서 돈을 벌기 위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영사 재판권,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및 일본 화폐의 사용 등이 인정된 불평등 조약을 이용해 약탈적인 무역을 자행하였다. 일본 상인은 고리대를 이용하여 우리 농민의 토지를 헐값으로 사서 점차 농장을 확대해 갔다. 이러한 토지 약탈은 1904년 러·일 전쟁을 계기로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라는 명목 아래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열강의 이권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금광 채굴권, 철도 부설권, 삼림 채벌권 등 여러 이권이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등에게 넘어갔다. 조선 정부는 열강의 이러한 경제적 침탈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조선이 외국에 넘긴 사업의 대부분은 오늘날의 함경도, 평안도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다. 특히 평안북도 운산 금광(金鑛)은 한반도 최대의 금광으로써 조선시대 금생산량의 1/4을 차지하던 대규모 광산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 조선후기 민란을 주도한 홍경래가 운산에서 금을 캐기 위해 노동자들을 모으기도 했다. 조선말기 운산 금광을 불하 받은 미국 금광 관리인들은 조선인이 다가오면 ‘금을 훔치려 한다’고 생각하고 접근을 막았으며 ‘만지지 말라’는 뜻의 'No Touch' 하던 말이 변하여 오늘날 귀한 자원인 금을 상징하는 말인 '노다지'가 되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이 '노다지'란 단어 뒤에는 우리의 것을 지키지 못하고 외국에 그 이익을 고스란히 넘겨주었던 아픔이 담겨져 있다.


조선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일본은 평야가 많고 기후가 온난한 남쪽 지역에서는 농업 분야를 집중적으로 발전시켰고 광물 매장량이 많고 평야가 적은 북쪽 지역에 주로 공업 분야 업체를 배치시키며 주로 자원 수탈과 중국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인식하며 개발해 나갔다. 


이 때문에 1945년 남북이 갈린 이후에도 북쪽 지역은 남쪽 지역에 비해 공업 부문의 수준이 높았다. 해방 직후 남북의 자산 분포를 보면, 전체적으로 남북이 비슷하였지만 광공업 부문은 북쪽 지역이 월등히 높았다. 광복 직전 북한은 한반도 전력의 92%, 철광석의 98%, 유연탄의 87%를 생산했고 금속 산업의 90%, 화학 산업의 82%를 갖고 있었다. 북한은 남한에 비해 월등한 경제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일본은 철도에 집착이 강했다. 철도는 인적·물적 자원을 대량으로 운송할 수 있는 육상 운송 수단이다. 대륙 침략을 의도하고 있던 일본은 일본군의 수송과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가기 위한 수단으로 철도를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이 처음 획득한 경인선 부설권을 사들이고, 이어서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의 부설권을 차지하여 개통시켰다. 그 철도들은 모두 일본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기 편하게 항구까지 놓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