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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시대를 살다

영상의 힘




1983년 6월 30일 KBS에서는 한국전쟁 휴전 30주년특집으로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산가족 150명을 대상으로 3시간 정도 방영할 예정으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방송이 시작되자 1,000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몰려들었고 방송은 정규시간을 넘어 연장에 연장을 거듭했다. 이산가족을 찾는 행렬이 예상을 뛰어넘어 장사진을 이루자 KBS는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한 채, 세계 방송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산가족찾기'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하게 된다. 이 방송은 78%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고 방송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이산가족 상봉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11월 14일까지 138일 동안 총 453시간 45분 방송됨으로써 단일 주제 생방송 기록을 남겼고, 총 10만 952건의 신청건수가 접수되어 1만 180여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이산가족 찾기가 전 국민의 관심을 끌게 된 시점은 전쟁이 휴전되고 정확히 30년뒤의 일이다. 이산가족 찾기는 1970년대 초반부터 신문이나 라디오 등을 통해 간간히 진행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1983년처럼 대중적인 폭발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신문은 활자 매체의 한계가 있었고 라디오는 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실시간으로 정보제공이 되지 않아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 가족 확인이 어려웠고 어디에선가 정보를 접해도 확인이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는 경제 성장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방송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국민들 가슴속에 맺혀있던 한을 풀어주었다. 1983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천 달러 수준이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어 한 세대 전 잃어버린 가족을 찾고자 하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또한 1983년 실시간으로 영상을 접할 수 있는 텔레비전 보급률이 82.5%에 달해 전 국민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송통신 기술의 발전은 이산가족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1980년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면서 선명한 텔레비전 화면을 시청 할 수 있게 되었고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청주, 춘천 등의 전국 주요 도시를 실시간 생방송으로 연결하는 공영방송 KBS의 네트워크는 이산가족 상봉에 큰 힘을 발휘했다. 서울에 사는 누나가 부산의 남동생을 만났고, 대구에 사는 오빠가 광주의 여동생을 만나고, 전주에 사는 엄마나 청주에 사는 딸과 춘천에 사는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방송에서 미처 확인 하지 못했던 사항들에 대해서는 글을 써서 FAX를 통해 확인을 하기도 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지역 방송 네트워크를 연결해서 화면으로 가족을 확인하고 팩스로 문서를 보내는 것 자체가 최첨단의 방법이었다. 방송통신 기술의 발전은 휴전이후 30여년 동안 묵혀 두었던 ‘이산가족’ 이라는 사회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 주는 실마리를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