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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

분단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상처는 군인 뿐 아니라 민간인들에게도 많은 상처와 피해를 주었다. 분단이후 좌우익의 갈등으로 촉발된 대구폭동사건, 여수/순천 사건, 제주4.3사건을 통해 많은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전쟁 중에는 노근리 사건, 경남 거창 사건, 지리산 토벌대의 양민 학살사건등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고 전쟁 이후에는 북에서 무장공비와 간첩들이 내려 오기도 했고 남쪽에서 북으로 북파 공작원을 보개기도 했다.

인터넷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의 진상을 규명을 촉구하고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는 사이트들이 있다. 물론, 인터넷 웹사이트가 있는 사건들만이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아직도 진상 규명이 되지 않고 있는 사건들도 있고 역사속으로 잊혀진 사건들도 많다. 그리고 북한지역에 벌어 졌던 사건은 현실적으로 규명 자체가 불가능하고 북한군이나 좌익들에 의해서 져질러진 사건들도 사건의 규명이 어렵다. 제한적이만 지금에서라도 벌어지는 이러한 노력에 눈과 귀를 기울이고 몇십년전 선배들이 겪은 비극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제주4.3사건]

1945년 광복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와 미군정의 강압이 계기가 되어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이다. '4.3특별법'에 의하면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1일을 기점을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거창양민학살사건]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神院面) 일대에서 일어난 양민 대량학살사건이다.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된 후 빨치산 공세가 강화되자 후방의 빨치산과 대결하던 국군 일부 부대가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공비(共匪)토벌작전 중 민간인이 공비들과 내통하였다고 오판하여 2월 10일 내탄(內呑) 부락 골짜기에서 청장년 136명을, 11일 박산(朴山)계곡에서 527명을 중화기로 무차별 학살하였다.


[노근리양민학살사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충북 영동군 노근리의 철교 밑 터널 속칭 쌍굴다리 속에 피신하고 있던 인근 마을 주민 수백 명을 향하여 미군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300여 명이 살해되었던 사건이다. 1960년부터 진상규명에 대한 요청이 있었지만 받아 들어지지 않다가 1999년 미국 AP통신의 특종 보도로 인해 일반인들에게 알려 지게 되었다.


[이승복 어린이사건]

1968년 10월 30일 울진·삼척지구 해상으로 침투한120명의 무장공비 잔당 5명이 추격을 피해 북으로 도주하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이승복군(당시 9세)의 집에 침입하여 동조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승복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항거하자 순식간에 가족을 살해하였던 사건. 가족중 이승복군의 친형인 학관(당시 15세)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이승복 사건이 세상에 알려 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승복군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이야기 했는가의 진위(眞僞) 여부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으며 1982년 고향인 강원도 평창에 이승복기념관이 개관 하였다.


[북파공작원]

사람들이 ‘북파공작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3 겨울 개봉한 영화 ‘실미도’의 영향이 크다. 원래 ‘북파공작원’이란 한국전쟁중인 1952년부터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한 무장첩보원을 말한다. 적 생포 및 사살, 적군진지 주요시설물 폭파, 적지에서 각종 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야기, 첩보수집, 첩보망 구축 등을 주임무였다. 군 당국은 그동안 북한과의 관계를 우려해 북파공작원의 실체를 공식 인정하지 않았으나 1999년경부터 유족들이 이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1953년 휴전 이후 72년 남북 공동성명 때까지 북파된 공작원은 1만여명에 달하며 그중 사망.실종된인원은 모두 7726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파공작원 출신들은 현재 HID 북파공작원 유족동지회를 결성 국가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해 활동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