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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통일한국 스토리텔링

<외교열전> 사선 넘나든 남북大使 '동반 탈출'... 강신성 대사 이야기




"이제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현실의 제 위치로 돌아가야지요."

"그럼 잘 들 가십시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요."

예고된 '숙명의 이별'이었지만 두 사람의 가슴 속에 애잔함이 밀려들었다. 총성이 빗발치는 이역만리의 전란통에서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극적으로 동반 탈출한 강신성 주(駐) 소말리아 한국 대사와 김용수 북한 대사. 

양손을 부여잡은 두 사람은 진하고 두터운 동포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1991년 1월12일 오후 8시30분, 케냐 남부도시 몸바사 공항의 활주로에서 소말리아에서 탈출한 남북한 동포 20여명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뜨거운 작별인사를 나눴다. 그 위로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들이 처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 내전 발발..사면초가에 내몰린 공관 = '드라마'는 1990년 12월30일 오후 2시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말리아 수도인 모가디슈 시내 서북방향으로부터 갑자기 '쿵'하는 둔중한 대포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소말리아 반군세력중 하나로 아이디드 장군이 이끄는 USC(United Somali Congress)가 바레 정권의 장기독재에 반기를 들어 수도 침공에 나선 신호탄이었다. 

서쪽에서 불붙은 시가전이 확산일로로 치달았고 대통령궁 외곽을 중심으로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이 본격화됐다. 급기야 도시 전체가 혼돈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설마했던 '내전'이 마침내 발발한 것이었다. 

이틀 후인 1월1일 오전 강 대사는 서울 본부에 텔렉스를 넣었으나 불통이었다. 전화 자체가 '먹통'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대사관 차량인 현대 스텔라 프리마를 대낮에 무장괴한들에게 탈취당했다. 

신상에 위협을 느낀 강 대사는 대사관 사무실을 닫고 군인, 경찰들이 지키는 관저로 직원들을 모두 피신시켰다. 강 대사와 계모 참사관, 김 사무원 부부, 현지교포 이모씨 가족 세 명 등 모두 7명이었다.

관저에 모인 대사관 직원들에게는 '식량'이 최대 문제였다. 기존 경제질서가 무너지면서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할 수 없었다. 시내 곳곳에서 게릴라전이 이어지면서 외교공관과 사택이 약탈대상이 됐고 강 대사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당장 관저를 떠나자니 갈 곳이 마땅치 않고, 버티자니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4일 낮 12시, 이번에는 관저를 무장괴한들이 습격했다. 장총을 든 무장괴한 4명이 대문을 깨고 진입을 시도했다가 경찰 한 명이 총을 발사해 이를 격퇴했다. 그러나 곧이어 옆집을 털던 괴한 세 명이 뒷담을 넘어 기어들어 오려고 시도했다. 강 대사는 위험이 사방에서 옥죄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튿날 강 대사는 아탄 공항 수비대장을 찾아가 전날의 관저 피습사건을 전하고 도움을 청했다. 처음에는 난색을 보이던 수비대장은 미리 준비해간 300달러를 받고는 경찰 8명을 지원해줬다. 

◇ 남북한 대사, 뜻밖의 조우 = 7일 정오께 모가디슈 공항에 구조기가 온다는 소식을 접한 강 대사 일행은 황급히 짐을 챙겨 공항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미 구조기가 출발한 직후였다. 공항이 위험한 탓에 미리 대기 중이던 이탈리아 시민만 태우고 불과 5분만에 떠난 것이었다. 강 대사 일행은 낙담했다. 앞뒤가 완전히 막혀 옴치고 뛸 수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다가 모처럼의 '기회'가 찾아왔다. 모가디슈와 케냐 나이로비 관제탑간의 교신시스템을 이용해 구조요청을 한 결과 '9일중 한국 정부에서 보내준 구조지가 모가디슈에 갈 것이니 대기하라'는 연락이 왔다.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9일 오후 공항으로 나간 강 대사 일행은 뜻밖에도 북한 대사관 일행을 맞닥뜨렸다. 강 대사는 북측 김용수 대사에게 "처음 뵙겠습니다. 한국 대사입니다.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소말리아 외무부 구내에서 먼발치로 서로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자 김대사는 "허, 이 난리통에 여유만만하십니다. 넥타이까지 매시고..."라고 다소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공항에 나온 사정이 딱했다. 내전이 발발한 이래 북한 대사관이 무려 여덟번이나 무장강도의 침입을 당한 것이었다. 특히 바로 전날에는 떼강도 20여명이 들이닥쳐 부인과 아이들 목에 총을 들이대고 살해위협을 하면서 차량과 살림살이를 모조리 가져갔다. 공관에 더이상 머무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북한 대사관 직원들과 같이 공항으로 나온 아드리안 게오르게 루마니아 대사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남북한 대사관 사람들과 루마니아 대사는 한국 정부가 보내오는 구조기에 함께 타기로 했다. 그러나 예정했던 오후 2시를 넘기면서 상황이 이상해졌다. 공항 활주로로 향하는 대합실 문을 소말리아 군인들이 잠갔고 구조기는 공항에 도착해 이탈리아 시민 200여 명을 태우고 10여 분 뒤 그냥 이륙해버렸다. 

모가디슈-나이로비 공항 관제탑이 서로 교신하는 와중에 이탈리아 구조기를 한국 정부가 보낸 것으로 와전된 것이었다. 강 대사는 절망감에 몸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 남북한 한가족.."힘 합쳐 탈출하자" = 발길을 돌려 관저로 향하려던 강 대사의 마음속에는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동포를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곳에 두고 혼자만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부작위 살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 대사는 김 대사의 의중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관저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김 대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에 김 대사는 "별 수 있습니까. 공항에 남아서 기다려야지요. 여기서 죽으나 거기서 죽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다시 대사관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강 대사는 "그러면 우리 집에 갑시다. 경찰들이 지키고 있으니 비교적 안전합니다"라고 강하게 권했다. 김 대사는 잠시 직원들과 상의한 끝에 "먼저 들어가시고 1시간30분 후에 공항으로 차를 보내달라"고 했다. 

김 대사는 강 대사 일행이 떠난 사이 묵을 처소를 여러 경로로 알아봤으나 허탕이었다. 결국 김 대사 일행은 강 대사 관저로 왔고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은 결국 한가족이 됐다. 


이제 탈출방법이 고민이었다. 구조기를 부를 수 있는 이탈리아 대사관과 교섭하는 게 급선무였다. 문제는 이탈리아 대사관이 대통령궁 인근에 위치해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격전장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강 대사는 소말리아를 탈출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해 이탈리아 대사관과 직접 교섭하기로 했다.

10일 아침 일찍, 강 대사는 현지교포 이씨와 함께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향했다. 강 대사를 태운 벤츠는 시외곽을 거쳐 총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는 시내중심을 통과해 이탈리아 대사관에 도착했다. 

시카 이탈리아 대사의 첫 반응은 냉담했다. 자국 공관원들과 시민도 보호하기 버거운 판에 '군식구'들까지 떠안는 게 부담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강 대사는 "하루라도 속히 여길 떠나고 싶다. 도와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직원들과 회의를 하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진 시카 대사는 서너 시간 뒤에야 돌아왔다. 본국 정부의 협조를 얻어 적십자사 구조기 한대를 마련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강 대사 일행에게 돌아갈 자리가 일곱 또는 여덟석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시카 대사는 "북한과는 수교하지 않아 곤란하니 한국 직원들만 태우라"고 권했다. 

그러자 강 대사는 시카 대사에게 매달렸다. "대사는 우리들의 모세요. 우리끼리는 절대 못갑니다. 모두 데려가주시오". 시카 대사는 다시 본국 정부와 협의했고 그 결과 천신만고 끝에 군 수송기 한 대를 추가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 빗발치는 총알..北 외교관 '불운의 피격' = 이제 관저에 남아있는 일행을 안전하게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데려오는 일이 남았다. 시카 대사는 고맙게도 일본 미쓰비시제 왜건을 빌려줬다. 

관저로 돌아온 강 대사는 남북한 직원들을 모두 불러모았고 전체 22명이 차량 4대에 분승(分乘)하기로 했다. 선두에 설 벤츠차는 현지교포 이씨가 운전했고 두번째 김모 사무원이 운전하는 공관장 차에는 남북한 대사들이 함께 탔다. 북한 박모 서기관이 운전하는 왜건이 그 뒤를 따랐고 마지막 차량은 계모 참사관이 맡았다. 

오후 3시30분께 남북한 대사관의 차량행렬은 이탈리아 대사관을 향해 출발했다. 시내 중심가인 쥬마거리에 들어서 중앙은행 건물을 막 지나가려는 순간 칼날 같은 총소리가 터졌다. 이들 행렬을 반군으로 오인한 정부군이 집중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차량들은 우측 골목길로 들어섰고 다시 좌회전해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이어지는 큰길로 나왔다. 

그런데 세번째 왜건의 상태가 이상했다. 똑바로 가지 못하고 길의 중앙분리대 위로 뒤뚱거리며 올라갔다가 다시 뒤뚱거리며 내려왔다. 300여미터를 더 달려 선두차가 마침내 이탈리아 대사관 후문에 도착했고 남북한 대사를 태운 두번째 차량이 약간 옆으로 돌아서 멈췄다. 그때 왜건차량이 두번째 차량의 옆구리를 쾅 들이받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차안에서 북한의 박 서기관이 백지장 같은 얼굴에 코피를 흘리며 운전석 뒤로 젖혀져 있었다. 정부군이 쏜 총알이 운전석 좌측 옆구리 차체를 뚫고 굴절해 들어가 박 서기관 심장에 박혀버린 것이었다. 

강 대사 일행은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들어가자마자 박 서기관을 대사관 1층 사무실 복도 우측의 출입통제 구역에 눕혔다. 그러나 답답한 숨을 몰아쉬던 박 서기관은 끝내 숨을 거뒀다. 강 대사는 혼절한 부인에게는 '남편이 이탈리아 로마로 치료받으러 갔다'고 말하고는 시체를 청소용품 광에 넣어두었다가 그날 밤 현관문 남쪽화단에 매장했다. 강 대사는 매장할 때 박 서기관의 머리를 한반도로 향하도록 눕혔다. 북한의 김 대사는 직원들을 도열시킨 뒤 "그대는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 희생한 우리의 영웅이오. 그대의 혼이여! 편히 잠드시라"고 조사를 읊었다. 이탈리아 대사관저 현관에 숙소를 차린 남북한 사람들은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인 11일 구조기가 공항 하늘을 맴돌다가 그냥 돌아갔다. 북한측 숙소에 모인 남북한 사람들은 이런저런 얘기꽃을 피우며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했다. 강 대사가 먼저 "북한에도 강씨가 많이 사느냐" "남남북녀라는 말을 들어봤느냐" "북쪽에서도 문중을 따지느냐"는 등의 화제를 던지며 가볍게 담소를 나눴다. 

늦은 밤 잠자리에 들 무렵, 남북한의 두 대사는 김 대사의 손자에게 말을 걸면서 한층 가까워졌다. 김 대사는 "고향이 남포인데 오래전에 그곳에 이십여리나 되는 둑과 갑문을 세워 담수를 모아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 농사를 짓는다"는 얘기를 했다. 


◇ 필사의 탈출..12일간의 드라마 종지부 = 이탈리아 대사관 측은 이튿날인 1월12일 오후 4시에서 6시 사이 이탈리아 시민과 함께 남북한 대사관 직원 일행을 공항으로 이동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 시간대에 정부군과 반군이 전투를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내 '대탈출의 날'이 밝아왔다. 아침에 영국 BBC 방송이 코리아 외교관 한 명이 소말리아 내전을 피하던 중 피격으로 숨졌다고 보도했다. 이미 본부에 보고할 전문 기안을 마친 강 대사는 김 대사에게 박 서기관 사망과 북한 직원들의 근황을 평양에 보고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로마의 식량농업기구(FAO) 북한 대표부를 통해 평양에 보고하라는 아이디어까지 제시했다. 

이때 강 대사는 본의 아니게 남북한 최초의 통합대사 역할을 했다. 강 대사는 김 대사가 북한 직원들을 시켜 만들어온 전보 기안문의 표현을 직접 수정하고 심지어 영문 번역까지 손수 했다. 강 대사는 자신이 서울에 보낼 전문과 북한측 전문을 함께 들고가 시카 대사에게 타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부군과 반군으로부터 정전(停戰) 약속을 받아낸 이탈리아 대사관 측은 강 대사 일행에게 출발 준비를 하라고 통보했다. 강 대사는 시카 대사에게 공항으로 가는 방탄버스에 북한측 부인과 아이들만이라도 태워달라고 간청했고 결국 몸이 아픈 김 대사 부인과 박 서기관 부인, 그리고 아이들 4명이 그 버스에 타게 됐다. 남북한 대사는 강대사 공관장 차량에 동승했고 나머지 직원들은 미니버스와 이탈리아 차량에 분승했다. 

살얼음 같은 정적을 뚫고 큰길로 나온 차량행렬은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두 대의 구조기가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었다. 한대는 흰색 바탕에 빨간 적십자 표지를 한 적십자사 구조기이고 다른 한대는 초록색이 얼룩덜룩한 군 수송기였다. 남북한 직원들을 태운 차량은 군 수송기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리며 땅이 흔들렸다. 활주로 밖에서 200명이 넘는 새까만 소말리아 인파가 수송기를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강 대사 일행은 인파에 휩쓸리다시피 하며 수송기 후문에 다다랐다. 구조원의 손에 이끌린 강 대사는 마침내 수송기에 오르게 됐다. 기내에서 조우한 두 대사는 "이제 안심해도 된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고 서로를 위로했다. 장장 12일간에 걸친 '대탈출극'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강 전대사의 이 같은 극적 체험은 내란에 휩싸인 타국에서 뜨거운 인간애와 동포애를 발휘해 남북간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죽기 전에 김 대사와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강 전대사는 "극한상황에 몰리니까 이데올로기나 국가가 없더라. 인간애적 입장에서 서로 돕고 살자는 의지뿐이었다"면서 "대승적 차원에서 북한에 대해 포용력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남북이 숙명적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는 외교현실이지만 공동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이념과 체제를 넘어서는 인간애와 포용력을 발휘하는 게 필요하고 그것이 남북관계와 나아가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게 강 전대사의 지론이다. 

◇ 강신성 전 칠레 대사 = 1961년 외무부에 들어온 뒤 주인도 대사관 서기관과 주제네바 참사관, 주밴쿠버 총영사, 주유럽공동체(EC) 대표부 공사, 주칠레 대사 등을 거치며 전방위적인 외교 경험을 쌓았다. 

특히 소말리아 대사로 재직 중이던 1991년 내전이 터지자 북한 공관원 14명을 이끌고 함께 위기상황에서 탈출했던 일화가 언론에 소개돼 '이념을 초월한 인간애'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퇴임 후인 2006년 소말리아에서의 경험을 다룬 장편소설 '탈출'로 등단하며 소설가로 변신했다. 2007년에도 소설 '붕장어'를 펴내는 등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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