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가을 마침내 나는 뉴욕에 도착했다. 우선 뉴욕 콜럼비아대학의 어학원에 입학해서 1년 간 영어와 힘겨운 씨름을 해야했다. 시행착오도 많았고 웃지 못할 실수도 많았다. 슈퍼에 가서 깡통 수프(soup)를 사려고 하면 점원은 비누(soap)를 집어다 주었다. 내 발음이 ‘수프(soup)’와 ‘소프(soap)’를 구분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도 영어가 어지간히 의사소통에 이르렀다고 생각될 즈음 나는 페에레이디킨슨대학(FDU)에 입학하였다.
전공은 국제정치학이었지만 온갖 필수과목을 택해야 하는 나로서는 코피를 흘리며 밤을 새워야 하는 날도 많았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한 고비를 넘길 때마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느낌으로 헤쳐나갔다. 그래서 3년 안에 학사학위를 끝낼 수 있었다. ‘공부는 고통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경험했던 시절이었다. 뉴욕시의 유엔 건물 앞을 지날 때면 언젠가 나는 외교관이 되어 그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상기하곤 했다.
당시 국제정치학의 대가인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 교수와 존 허츠(John Hertz) 교수가 강의하는 뉴욕시립대학(CCNY) 대학원에 나는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그 때는 이분들의 책만 읽어도 자랑거리였는데 직접 강의를 듣는다고 하니 마음이 설레고, 그 분들과 만나면서 나는 심층적인 공부를 한다는 긍지를 느꼈다.
그런데 나를 한번 더 흔들어 오늘의 내가 있게끔 하는 동력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첫 학기에 세계적인 사회주의 경제학자인 피터 와일리스(Peter Wiles) 교수가 런던에서 시립대학에 1년 간 교환 교수로 왔고 나는 그의 소련 경제학을 택하게 되었다. 강의가 끝난 어느 날 와일리스 교수는 내게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남한에서 왔다고 답하자, 그는 북한의 경제에 관심이 많으니, 북한 경제에 관한 리포트를 하나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유엔과 대학 도서관의 사회주의 자료를 뒤져서 리포트를 완성하여 제출하였다.
와일리스는 분단된 한국의 통일을 대비해서 북한 연구를 하면 그 분야의 선구자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엔 전등이 번쩍 켜지는 충격을 느꼈다. 그는 또 내가 원한다면 런던 경제대학(LSE)에서 장학금을 주어 박사학위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외교관의 꿈을 접고 남북관계를 연구하는 북한학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석사과정을 마친 후 나는 사회주의 정치 경제 사회 철학으로 명성이 높았던 뉴욕 사회과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어느 봄날 뜻하지 않게 군복무 문제로 모든 공부를 중지하고 귀국해야 했다. 그 때는 퍽 아쉽고 아득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도 나의 학문의 길을 열어주는 데는 큰 지장이 되지 않았다.
귀국하자마자 내가 39사단에서 신병훈련을 끝낸 후 배치된 곳이 북한 연구를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미국에서도 찾을 수 없는 자료들을 접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고, 2년 간 밤낮 없이 특수자료실의 모든 북한 자료들을 읽고 분석하였다. 군복무가 끝날 무렵 나는 ‘북한사회의 구조적 분석’이란 첫 저서를 남길 수 있었다. 이때부터 공부는 전문화되었고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나는 뉴욕으로 다시 돌아가 박사학위를 끝내는 대신 당시 무너져 가는 한 대학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 때 나는 대학을 발전시키는 첫 번째 특성화 플랜으로 한층 심화한 북한연구를 위하여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를 서울에 세웠다. 태평로 광학 빌딩 안에 조그만 사무실 하나를 빌려 시작한 것에서 국내 처음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라는 주제로 대규모 국제학술회의를 조선호텔에서 개최하였다.
그 후 30년 간의 연구소 발전 과정에서 세계 석학들이 다녀갔다는 자부심 외에도, 우리의 젊은 연구원들을 전문가로 키웠고, 민주화 운동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학도들에게 개방함으로써 그들이 훗날 한국 학계의 중추적 연구자로서 성장하는데 기여했다는 생각에 가슴 뿌듯하기도 하다.
1998년 10월 나는 30여 년 간의 북한 연구자로서의 만감을 안고 평양을 방문했다. 북한 김책공대와 교류의향서를 서명하기위해서 였다. 체류기간 중 북쪽의 많은 곳을 둘러보며 북측 사람들과 한국의 대북 정책에 관해 토론을 할 수 있었다. 국민의 정부의 대북 정책은 절대로 북한이 우려하는 흡수통일정책이 아님을 설득하면서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면 내 자신 자문위원으로 오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다.
바로 다음해 1999년 성탄 전날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날 나는 국민의 정부의 부름을 받았다. 대통령께서 남북관계를 탈냉전관계로 바꾸는데 “박 총장을 제일의 전문가로 생각하고 통일부 장관으로 요청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2000년 역사적인 6ㆍ15 정상회담을 여는 과정에서, 또 여러 차례 장관급 회담에서도 대통령께서는 나의 의견과 분석을 믿고 힘을 실어주셨다. 대북 관련 업무에 혼선이 없도록 모든 부처가 통일부의 협조를 받도록 지시도 해주셨다.
자신을 천거해준 윗분에게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신감과 긍지를 느끼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책임감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란 물음에 대한 답은 내게 가장 명확해졌다. 전문가로서의 연구는 끝이 없기에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장관직을 끝내고 나서부터는 국내외 각처에서 강의 요청이 계속된다. 국민에게 바른 정보와 분석을 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더 깊이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일보 2005. 8. 29 ‘나는 왜 공부하는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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