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혁신/사회적기업(SE)

‘설렁탕’과 ‘선농단’

“설넝탕집에 들어가는 사람은 절대로 해방적(解放的)이다. 그대로 척 들어서서 ‘밥 한 그릇 줘’ 하고는 목로 걸상에 걸터 앉으면 일분이 다 못되어 기름기가 둥둥 뜬 뚝배기 하나와 깍두기 접시가 앞에 놓여진다. 파·양념과 고춧가루를 듭신 많이 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가지고 훌훌 국물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도무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없으며 무엇에다 비할 수가 없다.”

- ‘괄세 못할 경성(京城) 설넝탕’, 잡지 <별건곤> 1929년 12월




'설렁탕'은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중음식이다. 쇠머리, 뼈, 내장 등 여러 부위를 함께 넣고 장시간 푹 고아서 만든다. 따끈따끈한 설렁탕에 파를 듬뿍 넣고 깍두기나 김치 국물을 함께 곁들인 뒤 밥을 말아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푸짐한 양에 배도 든든해진다. 설렁탕이 처음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가장 설득력있는 것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하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의 제사를 모신 ‘선농단(先農壇)’에서 시작되었다는 거다. 조선시대 세조 때부터 선농단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는데, 이를 선농제(先農祭)라 했고, 제를 올린 뒤 임금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렸다. 특히 이 행사를 보기 위해 모인 백성들을 위해 임금께서 국밥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는데, 선농단에서 끓인 국밥을 ‘선농탕’이라 했고, 이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이 되었다고 한다. 국민 음식 설렁탕 탄생의 배경에는 자연기후와 백성들의 삶을 생각하는 나라님의 고민이 담겨져 있었다.


사실 나라님들은 백성의 삶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다양한 정책을 펴서 백성들의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개선시키려 노력을 많이 했지만 그들 역시거대한 자연 앞에서 연약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이를 빗대어 생겨난 말이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이다. 아무리 임금이 덕이 많고 지혜로워도 백성의 가난한 삶까지 윤택하게 하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과거 농업 사회에서 사람들은 풍년과 흉년에 희비가 엇갈렸다. 적정량의 비가 내리고 적정한 일조량을 받아 풍년일 때는 나라님을 칭송하지만 가뭄과 홍수가 발생해 흉년이 들면 나라님의 부덕함에 화살을 돌리고는 했다. 흉년이 계속되고 여기에 관리들의 폭정까지 더해지면 이내 민란이 봉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왕을 비롯한 지도층들은 하늘을 바라봐야 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은 그냥 빈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