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2006년 감독:안판석 출연:차승원,조이진,심혜진,송재호 등
2006년 1월 7일. 전라북도 전주에 있는 ‘한국 소리문화의 전당’의 풍경. 1층 입구에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다. 공연장으로 들어서는 양편의 계단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라는 현수막과 인공기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로동신문과 북한 가극 공연 스틸들로 가득한 벽면을 따라 객석 문을 열면 무대와 객석은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하다. 이 장면은 실제 북한 예술단의 공연 실황이 아니다. 영화 <국경의 남쪽>의 하이트라이트인 북한 혁명 가극 <당의 참된 딸>을 재현하는 장면이다. 제작진은 오케스트라 단원인 주인공 김선호 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웅장한 스케일의 장면으로 연출해 냈다. <당의 참된 딸>은 북한의 5대 혁명 가극의 하나로 ‘한국전쟁 당시 부상병을 후송하는 공을 세운 젊은 여성이 죽는 순간에도 당증과 당비를 당에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국(북한)을 위해 헌신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혁명 가극의 이야기와는 맞지 않게 영화 <국경의 남쪽>의 주인공은 이 공연을 마지막으로 조국을 탈출하며 사랑하는 여인과 이별을 하게 된다.
북녘 청춘(靑春)들의 엇갈린 러브스토리
영화 <국경의 남쪽>은 배고픔과 탄압을 받는 북한의 현실을 ‘고발’하는 정치색이 짖은 작품이 아니다. <국경의 남쪽>은 남녘 땅으로 내려 온 한 탈북자가 북에 두고 온 연인을 못 잊어 애타게 그리다가 천신만고 끝에 재회하지만 끝내는 남남이 될 수 밖에 없는 애환을 다룬 영화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국경을 넘은 남녀에게 일어난 엇갈리는 사랑의 슬픔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주인공 김선호(차승원)는 1975년 조선로동당 창건일인 10월 10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호는 예술가다 그것도 북한 예술가들의 로망인 만수예술단 오케스트라의 ‘호른’ 연주자다. 선호에게는 사랑하는 연인 이연화(조이진)이 있다. 선호는 성격도 얼굴도 동치미처럼 찡하구 시원한 연화를 정말 좋아한다. 연화는 직설적이며 씩씩한 인물이다. 순수한 청년 선호와 씩씩한 아가씨 연화는 사랑고백 또한 유쾌하다.
<직사포 사랑고백>
연화 : 기니까 나랑 결혼하고 싶다. 이 말입니까?
선호 : !! 야. 이거 완전히 직사포구만.
연화 : 선호 동지하고 나 사이에 산이래두 솟아 있어야 곡사포를 쏘지
이렇게 마주 섰는데 직사포를 쏘지 그럼 곡사포를 쏘겠어요?
<첫 키스>
선호 : 내가 요새 호른을 불수가 없어. ‘호른’을 부는데 왜 ‘호른’ 소리가 안 나고 네 목소리가 들리니? 국사발에 네 얼굴이 동동 뜨니 그 얼굴만 쳐다보다 국이 다 식어버린다 야.
연화 : 야단났네. 실은 나두 그 병에 걸렸시오.
연화를 향한 선호의 사랑은 순수하고 아름답다. 별일이 없는 한 일과 사랑에서 선호의 인생은 거침이 없을 듯 보인다. 하지만 늘 행복하고 평온 할 것 같은 선호와 연화에게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어느 날 선호의 아버지 (송재호)가 가족회의를 소집한다. 이 자리에서 아버지는 폭탄선언을 한다. ‘6.25때 자랑스럽게 전사 한 줄 알았던 할아버지는 실제로는 남한에 살아 있으며 그동안 서신을 교류해왔다’고 고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서신교류가 당국에 적발된 탓에 가족의 운명까지 위험에 처하게 됐다. 결국 이들 가족은 탈북을 결행하게 되고, 선호는 ‘사람을 보내서 남으로 부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연화 곁을 떠난다.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선호가 북한을 탈출하고 우여곡절 끝에 남한에 도착하며 시작된다. 선호가 북에 두고 온 연화와 접촉을 시도하다가 사기를 당하고, 또 다른 여인 경주(심혜진)를 만나며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선호는 한동안 사랑하는 연화만을 떠올리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다시는 못 만날 거란 생각에 막막해 한다. 결국 북한쪽 소식통으로부터 연화가 결혼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들은 선호는 그의 상처와 삶을 보듬어주는 경주와 함께 가정을 꾸린다.
선호의 마음, 연화의 마음
선호와 선호의 가족은 남한에 와서 생존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북으로 편지를 보내온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이제 이들에게 남은 것은 자본주의 남한에서의 살아남는 일이다. 식당을 개업한 선호의 가족은 이들이 한때 존경했던 지도자 동지의 옷을 입고 행인의 옷깃을 붙든 채 호객행위를 해야 한다. 이런 삶에 익숙 해질 무렵 연화는 죽음을 각오하고 국경을 넘어 사랑하는 한 사람 선호를 찾기 위해 남한에 나타난다. 선호는 연화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당황하지만, 서서히 옛사랑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선호와 연화는 다시 만나 변하지 않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이미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후였다. 연화는 우연히 탈북자가 운영하는 식당을 소개하는 한 TV 프로에서 선호가 경주 등 가족들과 함께 출연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가 이미 결혼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직 선호와 결혼하겠다는 일념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연화 역시 국경을 넘었지만 그녀 앞에는 현실의 좌절이 놓여 있었다. 선호 역시 고민과 갈등을 한다. 사랑하는 연화가 눈앞에 다시 나타났지만 초라한 자신을 온몸으로 받아준 현재의 아내 경주를 저버릴 수도 없다. 옛 사랑의 흔적을 아파하는 선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선호는 연화가 임시로 머물고 있는 ‘하나원’의 담을 넘는다. 현실의 벽 앞에서 다시 만난 선호와 연화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슬픈 재회>
선호 : 연화야. 난 바꼈어. 옛날의 김선호가 아니야. 여기와서 서울 시민 김선호로 다시 태어난거야. 그니까 무슨 말이냐면.. 나 다신 여기 안와. 연화야. 나 잊어먹어.
연화 : 그 여자 젖가슴이 맞져집니까? 그 여자 젖가슴이 만져지더냐구요!
결국 사랑을 지키고 확인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던 선호와 연화는 해피엔딩이 아닌 찢어진 아픔을 남기며 현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된다. 선호는 연화를 잊지 못해 애태우다가 경주와의 사이에서 첫 애가 태어나자 행복에 겨워 돌 사진을 찍기 위해 한 사진관을 찾았다가 면사포를 쓴 연화의 사진을 발견하게 된다. 알고보니 연화는 사랑하는 선호를 떠난 후 정착생활을 안내하고 신변을 보호해 주던 담당 경찰관의 청혼을 받아 들여 결혼을 하게된다. 지금 연화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남한 아내, 북한 아내
선호와 연화처럼 여러 사연들로 인해 북녘에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탈북자들의 이야기들이 있다. 탈북자들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부터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마음속에 묻어둔 이야기가 아닌 법적인 문제로 까지 확대 되었다. <국경의 남쪽> 속 선호와 연화는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결혼을 하지 않아 이들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는데에는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북한에 배우자를 두고 혼자 남한에 왔을 경우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남겨 둔 배우자와 법적인 이혼 절차를 밟아야 한다. 또한 남한에서 재혼을 했으나 북한의 배우자가 탈북 하여 남한에 올 경우 여러 복잡한 문제들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벌어지고 있다. 2005년 3월 부부간의 문제를 다룬 KBS 단막 드라마인 <사랑과 전쟁>에서는 ‘남한 아내, 북한 아내’라는 주제를 이러한 내용이 다루어지기도 했다. ‘남한 아내, 북한 아내’에서는 남한 아내와 북한 아내 등 2명의 두 아내를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탈북자 남편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남한 아내, 북한 아내’와 같은 사례들이 늘어나자 정부에서는 2007년 북한이탈주민보호법을 개정하여 탈북자들이 북한의 배우자를 상대로 하는 이혼 청구를 가능하도록 했다. 그리고 2007년 4월. 북한 배우자를 상대로 이혼 신청을 한 탈북자 13명에 대해 법원은 “북한을 이탈하게 된 경위, 배우자가 남한에 거주하는지 여부가 불명확한 점, 남북이 나뉘어 주민 사이의 왕래나 서신 교환이 자유롭지 못한 현재 상태가 가까운 장래에 해소될 개연성이 크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해 보면 혼인관계를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며 이들의 이혼 신청을 받아 들였다. 이를 시작으로 매년 적지 않은 숫자의 탈북자들이 북한에 두고 온 배우자에 대한 이혼 소송을 진행 하고 있다.
이들의 사연은 영화속 선호와 연화의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처럼 이들은 그(그녀)를 두고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렇다고 되돌아 갈 수도 없다. 이들은 지리적인 국경은 넘었지만 현실속에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혀 버렸다. 그리고 사연속의 그(그녀)를 기다리다 결국은 법원을 찾아 이혼 청구서를 제출해야 했다. 영화 <국경의 남쪽>속에서 선호가 연화을 잊고 경주와의 새로운 삶에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의미를 부여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악몽과도 같은 현실속에서 선호는 가슴이 찡한 클로징 나레이션을 한다.
“처음 소년단에 입단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께서 세워주시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장군님께서 빛내어 주시는
영광스러운 조선소년단에 입단하면서...
그 땐 인생이란 게 그저 세상의 모든 적들을
용맹하게 물리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망설임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삶이란
이해할 수 없는 음표로 가득 찬 악보와도 같아서
제가 할 일은 그저.. 더듬더듬.. 연주 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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