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길 (재단법인 통일과 나눔 사무국장)
1950년 4월 19일. 미국 보스턴 마라톤에서 한국 선수들이 나란히 1,2,3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1위를 한 선수는 당시 스무살 약관의 함기용(현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이었다. 보스턴 마라톤 우승으로 함기용은 일약 세계의 주목을 받는 마라토너가 되었다.
하지만 함기용에게 이 대회는 처음이자 마지막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함기용의 마라톤 시계는 두 달뒤 벌어진 6.25 동란으로 멈춰섰다. 전쟁통에 마라톤에 전념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불과 20대 초반의 나이에 말이다. 청년 함기용에게 전쟁은 한마디로 ‘꿈의 상실’ 이었다.
함기용은 어린 시절 고향 춘천에서 달리기 잘하는 소년으로 유명했다. 어찌나 잘 달리던지 손기정을 배출한 육상명문 서울 양정고보에서 그를 데려갔을 정도였다. 지역사회와 육상계의 뜻을 모아 10년 전인 2005년 춘천 송암레포츠타운에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다. 그 동상 앞을 매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참가자들이 지나간다.(마라톤 출발선에서 5km지점) 춘천마라톤 참가자들이 달리는 길에는 함기용 선수 이야기처럼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희망을 간직한 숨겨진 스토리들이 있다.
춘천마라톤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로 꼽히는 서면 구간(15~20km 지점)은 안정효의 소설 <은마는 오지 않는다>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1963년 여름 당시 서강대 3학년 학생이었던 안정효는 춘천 서면을 찾아 분단, 전쟁, 미군 부대 등 춘천의 여러 요소를 녹여 상처받은 사람들의 애잔한 이야기를 소설로 담아냈다. 소설 속 주인공 언례와 그의 아들이 어디에선가 달리는 마라토너를 보고 있지 않을까 착각할 정도로 서면은 고즈넉한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라톤 선수들이 가장 피로를 느끼는 35~40km 지점인 우두동 소양강변은 6.25 동란 초기 가장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곳이다. 기습 남침한 북한군에 국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 38선에 인접한 춘천지역에 주둔한 국군 6사단 7연대는 무려 3일간을 버티며 북한군의 남하를 막았다. 그 치열했던 전투의 현장이 바로 우두동 소양강변이다. 춘천지역 전투는 낙동강전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 동란 초기 3대 전투로 손꼽힌다. 지금은 한적한 가을 들녘으로 보이지만 65년 전 이곳은 동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 했던 비탄의 장소였다.
마라톤 골인 지점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옛 춘천 미군 부대 자리를 지나야 한다. 춘천 미군 부대는 지난 1983년 한중 관계에 있어 기념비적인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 사건으로 당시 적대국가였던 한국과 중국은 처음으로 외교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서로를 ‘남조선’과 ‘중공’이 아닌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인정하면서 9년뒤인 1992년 한중 수교의 물꼬를 트게 된다. 30여년전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했던 한국과 중국의 어색했던 관계와 지금의 한중 관계를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2015년 가을 다시 춘천마라톤의 계절이 왔다. 춘천의 산과 들과 물은 어제나 오늘이나 같은 모습이지만 시대에 따라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져왔다. 무엇보다 춘천은 유일한 남북 분단 도(道)의 도청소재지이자 6.25 동란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다.
춘천 출신 마라토너 함기용의 삶이 그랬고 안정효의 소설 <은마는 오지 않는다>속에 등장하는 민초들의 삶이 그랬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춘천의 미래는 더 이상 우울하지 않다. 곳곳에서 희망의 싹이 트고 있다. 매년 가을 벌어지는 춘천 마라톤은 도시를 활기차게 하는 양념과 같다. 광복 70주년이자 분단 70년에 펼쳐지는 춘천마라톤. 가을길을 가볍게 뛰면서 코스에 담겨진 분단의 아픔, 통일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 보자. 미래의 꿈을 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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