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未知)의 땅,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한국에게 ‘미지(未知)’의 세계이다. 아프리카는 아시아 다음으로 큰 대륙이고 대륙 한가운데 적도가 지나고 있어서 무더운 지역이 많다. 아프리카에는 세계 최대의 사막인 사하라 사막이 있는데,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북부 아프리카와 중남부 아프리카로 나뉜다. 북부 아프리카는 백인종 계열이 대부분이고, 이슬람 문화권에 속한다. 중남부 아프리카는 흑인종이 대부분이고, 민족과 언어, 종교와 문화가 다양하다. 아프리카는 자원은 풍부하지만 산업 발달은 매우 더딘 편이다.
아프리카가 갖고 있는 무한한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아프리카를 직접 연결하는 항공편이 개설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2012년 6월 인천-케냐 나이로비 취항) 그동안 한국-아프리카 나라들의 직접적인 교류는 다른 대륙의 국가들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반면 과거 북한은 아프리카 나라들과 유대 관계를 맺었다. 특히, 북한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으로 양극화된 냉전 체제 속에서 어느 한 진영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의 국가 이익을 찾는 ‘비동맹’ 국가들이 많이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에 여러 모로 신경을 썼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Korea 하면 그것은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1982년 여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가봉을 비롯한 아프리카 5개국 순방을 했다. 가봉에 도착해서 엄숙한 표정으로 의장대의 사열을 받던 전두환의 얼굴은 이내 변해 버린다. 가봉 군악대가 연주한 곡은 한국의 애국가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북한의 애국가였다. 당시 장세동 안전기획부장이 곧장 달려나가 군악대 지휘자의 지휘봉을 내리치며 연주를 멈췄다. 국가가 아닌 곡을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외교적 결례인데 그것도 북한의 국가였으니 한국의 자존심은 상할대로 상했다. 가봉의 실수는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반면에 가봉을 비롯한 당시 아프리카의 입장에서 보면 외교적 결례이긴 했지만 그건 그냥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들과 가까운 Korea는 한국이 아닌 북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도 구별하기 어려운 Republic of Korea (한국의 공식 영문 국호),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북한의 공식 영문 국호)의 차이를 외국인들이 구별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인샬랴>
Korea란 같은 이름을 사용하지만 국제법상 다른 나라인 남한과 북한이 관련되어 벌어진 에피소드는 1980년대 후반 아프리카 북부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 이민용 감독의 영화 <인샬라>에도 고스란히 담겨진다. ‘인샬라’는 아랍어로 직역하면 '신의 뜻이라면' 의미이다. 모든 일은 개인의 힘이 아닌 신의 허락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민용 감독은 아프리카 사막에서의 남북의 이야기를 어떠한 하나의 큰 섭리가 있음을 전제하고 풀어나가는 듯 하다. 1988년 8월, 미국 유학생인 이향(이영애)은 학교 친구들과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을 여행한다. 아프리카 북부 알제리 타만라셋이라는 도시에 도착한 그들은 밀수업자로 오인을 받게 되고 출국금지 명령을 받아 낯선 땅에 억류된다. 이향은 호텔 앞에서 우연히 터어번을 두른 동양남자와 마주치고 짧은 만남을 통해서 어떤 운명적인 예감을 느낀다.
함께 여행하던 다른 나라 친구들은 자국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출국을 하게 되지만 이향만은 한국과 알제리가 미수교국인 관계로 출국하지 못하게 된다. 속수무책으로 불안정한 시간을 보낸 며칠 후, 지역 경찰서에 간 이향은 그곳에서 지난번에 만난적이 있는 동양남자와 대면하게 되는데 그는 알제리 주재 북한 외교관(실제 북한과 알제리는 1958년 수교)으로 있는 한승엽(최민수)이란 사람이었다. 알제리 경찰이 고립된 Korean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국에 근무하는 Korean 외교관을 부른 것이다. 외교관 승엽은 남한에서 온 여자 이향에게서 왠지 모를 연민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그녀가 알제리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다. 승엽의 적극적인 협조 요청에도 불구하고 알제리 당국의 출국조치는 내려지지 않고 이향은 초조한 나날을 보낸다. 설상가상으로 갖고 있는 돈 마저 떨어진 이향은 어쩔 수 없이 한 아랍인의 집에 들어가 하숙하게 된다.
하숙집 주인의 음흉한 행동에 위협을 느낀 이향은 그곳을 뛰쳐나와 낯선 땅에서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반면 승엽은 사하라 사막의 훈련소에서 ‘차드 혁명반군’를 훈련시키면서 이향을 그리워한다. 그러던 어느날 챠드 정부군 기지 침투의 임무를 수행 중이던 승엽은 서울로 돌아간 줄만 알고 있던 이향이 마을에 남아있음을 알게 되고 둘은 다시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체제와 이념을 뛰어넘은 뜨거운 감정의 교감속에서 이들은 알제리 당국의 눈을 피해 밀수업자와 함께 사막을 건너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나, 밀수업자들과 함께 사막을 건너던 이향과 한승엽은 도둑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막막한 사막 한 가운데 버려진다. 하늘과 맞닿은 끝없는 사막 한가운데서의 둘의 서로를 의지하며 사투를 벌인다. 현실의 답답한 갈증에서 벗어나 목을 축일 수 있는 오아시스를 찾아서 말이다.
소말리아에서 피어난 동포애
영화 <인샬라>속 이향과 한승엽 처럼 실제 극단의 위기 속에서 이념의 벽을 뛰어넘어 동포애로 도움을 주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이 이야기도 영화 <인샬라> 처럼 미지의 땅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일어났다.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정부는 10개 남짓 아프리카국과 수교를 확대한다. UN(국제연합) 정회원국 가입을 위해서였다.
1987년 12월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 한국 대사관이 설치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외교관 강신성은 소말리아 주재 초대 대사로 부임한다. 강 대사가 재임하는 3년여 동안 소말리아엔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1990년 12월 30일 소말이아 반군은 바레 정권의 장기독재에 반기를 들어 수도 침공에 나선다.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이 본격화 되자 극도의 신변 위협을 느낀 외국 대사관과 국제원조기관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1991년 1월초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엔 한국과 북한을 비롯해 단지 7개의 외국 공관만이 남아있었다.
당시 한국대사관은 외부와 모든 통신수단이 끊겨 말 그대로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1월 9일 모가디슈 국제공항에서 강 대사 일행은 간발의 차이로 탈출 비행기를 놓치게 되고 여기서 북한 대사관의 김영수 대사 일행을 만나게 된다. 이미 북한 대사관은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아 모든 것을 약탈당한 후였다. 동포인 이들을 놔두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던 강신성 대사는 북한 김영수 대사 일행 14명과 한국 대사관으로 되돌아 왔다. 남북한의 외교관과 그 가족들은 극도의 긴장감 속에 위기 탈출이라는 하나의 목표 속에 이념과 적대감을 벗어나 공동운명체가 되었다.
이튿날 이들은 비교적 안전한 이탈리아 대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강 대사는 남북 외교관과 그 가족들의 동반 탈출을 위해 북한과 외교관계가 없던 이탈리아를 설득했으며 결국 구조기 탑승을 허락 받게 된다. 1월 12일 이탈리아 대사관은 이탈리아 시민과 함께 남북한 대사관 직원 일행을 공항으로 이동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 시간대에 정부군과 반군이 전투를 중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탈출 일정이 확정 되자 강 대사는 서울의 외교부에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고했고 북한측 김영수 대사에게도 이동 중 피격 당한 북한 외교관과 북한 직원들의 근황을 평양에 보고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탈리아 로마의 식량농업기구(FAO) 북한 대표부를 통해 평양에 보고하라는 아이디어까지 제시했다. 이때 강 대사는 본의 아니게 남북한 최초의 통합대사 역할을 했다. 강 대사는 김 대사가 북한 직원들을 시켜 만들어온 전보 기안문의 표현을 직접 수정하고 심지어 영문 번역까지 손수 했다. 강 대사는 자신이 서울에 보낼 전문과 북한측 전문을 함께 들고 가 이탈리아 시카 대사에게 타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외교관으로는 하기 힘든 경험을 한 셈이다.
이윽고 소말리아 정부군과 반군의 정전(停戰)을 틈타 이탈리아 대사관을 나온 탈출 차량의 행렬은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남북한 직원들을 태운 차량은 대기중인 수송기로 향했다. 기내에서 남측의 강신성 대사와 북측의 김영수 대사는 "이제 안심해도 된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고 서로를 위로했다. 장장 12일간에 걸친 '대탈출극'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수송기는 두어시간 비행 끝에 케냐 남부 항구도시 몸바사공항에 도착했다. 남북 외교관과 가족들은 비행기에서 내려와 악수와 포옹을 하며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그간 고생에 대한 회포도 풀고 동포의 정을 더 느낄 수 있었을텐데 ‘안전지대’에서는 그러한 행동이 암묵적으로 용납 될 수 없었을 듯싶다.
강신성 대사를 비롯한 남북 외교관들의 이 같은 극적 체험은 내란에 휩싸인 타국에서 뜨거운 인간애와 동포애를 발휘해 남북간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강 대사는 "극한상황에 몰리니까 이데올로기나 국가가 없더라. 인간애적 입장에서 서로 돕고 살자는 의지뿐이었다. 대승적 차원에서 북한에 대해 포용력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남북이 함께한 1991년의 소말리아 대탈출은 공동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는 이념과 체제를 넘어서는 인간애와 포용력을 발휘하는 게 필요하고 그것이 남북관계와 나아가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는 샘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한 마음은 영화 <인샬라>속의 이향과 한승엽의 그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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