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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

그리운 금강산

# 가곡(歌曲) ‘그리운 금강산’....‘못 가본지 그 몇 해 Vs 더럽힌 지 그 몇 해’


2005년 11월 18일. 북한 강원도 금강산 옥류관에서 열린 금강관 관광 7주년 기념연회에서 열린우리당 소속 배기선 의원이 북한 노래를 한곡 부른 이후 배 의원의 부인인 성악가 이경애 씨가 무대에 올라 노래 한곡을 불렀다. 남한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 이었다. 하지만 이경애 씨는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북한을 자극 하는 가사 부분을 ‘응응응..’ 하며 허밍으로 넘겨 버린 것이다. 이경애씨가 허밍으로 넘긴 가사는 그리운 금강산 1절 가사..못가본지 그 몇해 (원래는 ‘더럽힌 지 그 몇해), 2절 ’비로봉 그 봉우리 짓 밟힌 자리‘ 부분이다.

이 노래는 1962년 한국전쟁 12주년 기념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금강산에 대한 그리움을 분단의 한과 북한에 대한 증오 넣어 표현한 것이다. 남한에서는 국민가곡이었지만 북한에서 특히 금강산에서는 불러서는 안 될 금지곡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곡을 만든 최영섭 선생이 2000년 금강산을 직접 방문하여 이곡을 부르려다 북한 당국에 의해 제지되는 사건도 있었다.

금강산은 남과 북을 넘어 우리 겨레가 세계에 자랑하며 내놓을 만큼 아름다운 명산중의 명산이다. 수많은 역사의 인물들이 이곳을 거쳐 갔으며 이곳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표현한 문학 작품, 서화, 음악 등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분단의 상황에서 금강산은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바라보며 꼭 가고 싶어 하는 곳 중의 하나였다. 못보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아련히 보이는 금강산 1만 2천봉의 끝자락인 낙타봉만이라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남한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통일전망대’로 달려갔다. 하지만 금강산이 바로 저기 보이건만 더 이상이 앞으로 갈 수는 없었다.

20세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98년 11월 18일 저녁 사람들의 오랜 바램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늦가을 차가운 바다 바람을 뚫고 유람선 금강호가 남한 강원도 동해항을 떠나 북한 강원도 장전항을 향해 뱃고동을 울리며 출발 했다. 남한의 민간인들이 북한을 여행하는, 남북 분단 50년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금강산관광은 한국의 기업인 현대그룹의 오랜 노력과 정부의 햇볕정책이 맞물려 그 결실을 맺었는데, 1989년 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방북하여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그 씨앗이 잉태되었다.

그 후, 1998년 2월 정몽헌 회장이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북한측과 첫 협의를 거친 다음, 6월 23일 금강산관광 계약이 체결되었음을 발표하였고, 8월 6일 통일부는 현대상선, 현대건설, 금강개발의 협력사업자를 승인하였다. 같은해 10월 13일 장전항 공사를 위한 자재와 장비를 실은 배가 출항하였으며 11월 14일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의 시험 운항을 마치고, 마침내 11월 18일에 금강호가 첫 출항한 것이다.

금강산관광은 진행 과정에서 남북한간의 갈라진 세월만큼이나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1999년과 2002년 두 번의 서해안 연평도 부근의 남북 해군간 교전 가운데서도 금강산관광사업은 계속 진행 되었다. 서해바다에서는 남북한 군인들이 총을 겨누며 싸우면서도 동해 바다에서는 남한의 관광객이 배를 타고 유유히 북한을 다니는 기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여행 분위기에 들떠 적절히 못한 언행으로 북한사람들을 자극하기도 했다. 또한 북핵 문제등 각종 안보 사건등이 터지면 금강산 관광 여행사들의 전화는 예약 취소로 늘 통화중이었고 문제로 검찰 조사 조사를 받던 실질적인 현대아산의 경영주인 정몽헌 회장이 자살을 하게 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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