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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이야기

진관체제(鎭管體制), 큰 위기에 약한 시스템

임진왜란 전 조선 각 지역을 지키는 지방군은 전국 행정 단위인 읍(邑)을 기준으로 군사단위 진(鎭)으로 편성했다. 국사시간에 꽤 여러 번 들어봤을 진관체제(鎭管體制)다. 임진왜란이이 일어나기전 조선은 외부로 부터의 큰 침입은 없었지만 해안가에는 왜구, 북쪽 국경지대에는 여진족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해안과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방위체제인 진을 설치했다. 그러다, 변방만 지키다가 외적의 침입을 당해 그곳이 무너지면 내륙은 방어할 수 없는 위험이 있을 것에 대비 세조 때부터 전국을 여러 개의 진관으로 개편하기 시작하여 1466년 진관체제를 완성했다. 이같이 정비된 진관체제를 바탕으로 각 도에 병영과 수영(水營)을 두어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로 하여금 육군과 수군을 지휘하게 했다.


진관체제를 통해 조선은 다음과 같은 방위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었다. 만약 적이 쳐들어오면 우선 수군이 막고, 수군이 뚫리면 1차 방어선으로 진관이 격퇴하고, 진관이 무너지면 다음 진관이 적을 방어하는데 시간을 벌며 인근 진관과 중앙으로부터 후원군이 도착해 방어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차적으로는 해당 지역에 외적이 쳐들어오면 자체적으로 방위하는 전략이었다. 당시 연안에 빈번히 출현하던 왜구를 해당 지역이 자체적으로 책임지고 격퇴하도록 되어 있는 일종의 자기 책임제였다.


이러한 진관체제 방어시스템은 수백 혹은 수천의 소규모 외적 침략에는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장점이 있다. 하지만 20만 왜군이 최첨단 무기를 갖고 조직적으로 몰려 왔을 때는 감당하기 힘든 시스템이었다. 순식간에 해안 방어선이 무너뜨리고 중앙에서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수도 한양을 향해 진격해 오는 왜군 앞에서 조선의 기존 방어시스템은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또한 진관체제하에서는 자기 책임 관할구역을 벗어나서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구역을 벗어나 작전을 수행하려면 조정의 공식적인 명령이 있어야 했다. 예를들어 전라도 지역 해안가 방어를 담당했던 이순신의 경상도 출전이 지연된 것은 당시 관할 구역 중심의 군사운영체제의 맹점 때문이었다.


전쟁 초기 조선은 왜군 조총의 기세에 둘렸고 대규모 외적을 상대할 만한 방어 시스템을 갖고 있지 못했다.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만한 유연성이 부족했다. 오늘날 기업과 사회가 위기에 직면 했을 때 어떤 유연성을 발휘해야 하는지에 대해 임진왜란의 초기 대응 모습이 잘 보여준다.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서 기업을 비롯한 각 조직에서 생존의 필수 요소는 주변에 잘 적응하고 대안을 만들어 내는 유연성이다. 세상은 수학 문제 풀듯 정해진 공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 물론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는 않는 원칙과 가치가 있긴 하지만 그 원칙과 가치도 주어진 상황에 따라 적용하는 방법이 각기 다를 수도 있다.


위기는 약속을 정하고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단점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명확한 현실 인식과 유연한 자세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