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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국

청년층을 위한 통일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1)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네 가지는 흔들 수 있는 깃발, 부를 수 있는 노래, 믿을 수 있는 신조, 따를 수 있는 지도자다.”

- 나단 푸쉬 前 하바드대 총장


1. 100여년전 젊은 그들

- 조선말기 개화사상(開化思想)에 영향을 받은 김옥균은 국가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다 33살때인 1884년 개화파 세력들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다.

- 1898년 개화사상과 기독교를 받아 들이느 23살의 청년 이승만은 독립협회와 언론 활동을 하며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 1893년 17살의 나이로 동학(東學) 운동에 참여한 청년 김구는 청년 시절의 대부분을 항일운동을 하며 현장 활동과 투옥을 번갈아 가며 했다.

김옥균, 이승만, 김구 뿐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많은 젊은이들이 풍전등화(風前燈火) 가운데 있는 조선의 운명을 바꾸어 보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었다. 이것은 19세기말 조선의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시대정신이었다. 어떤이들은 개화사상과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그 사명을 다 하고자했다. 또 어떤이들은 서구문물인 서학(西學)을 반대하며 동학(東學)을 만들고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의 운명을 바꾸려고 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속의 청년정신은 조선말과 일제시대 젊은이들에겐 일종의 횃불과도 같았다. 이상재, 안창호, 조만식 같은 지도자들은 젊은이들의 역할 모델이 되기도 했다. 암울했던 일제시대의 젊은이들에겐 항일독립이라는 대의명분을 바탕으로 분명 ‘흔들 수 있는 깃발’, ‘부를 수 있는 노래’, ‘믿을 수 있는 신조’, ‘따를 수 있는 지도자가’ 있었다.

그렇다면 통일시대를 살아갈 우리의 젊은이들은 어떨까?



2. 청년통일운동 3세대


1) 기획하기 보다는 기획 당했던 과거의 젊은 세대

경제용어 중에 ‘3D업종’이란 용어가 있다. 3D업종이란 건축업, 광업, 제조업 등 소위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스러운(Dangerous) 산업을 말한다.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 사람들은 3D업종에 진출하는 것을 기피한다. 경제 뿐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도 이러한 3D가 존재한다. 특히, 한국 사회의 통일문제가 그렇다. 통일문제는 이질화된 남북을 융화 시켜야 하고, 한반도 주변국 간의 얽혀있는 일종의 고차원의 방정식을 풀어야 하기에 어렵다.(Difficult) 또한 통일문제는 좋은 의도로 접근한다 해도 이데올로기 갈등이라는 진흙탕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깨끗한 옷도 진흙탕에서는 더러워지기 마련이다.(Dirty) 그리고 통일문제는 여기저기에 다양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남북관계 그리고 남북 간의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 모든 부분의 교류에서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들다. 그래서 남북관계는 위험 부담이 크다.(Dangerous)

한국 사회의 3D의 정점에 있는 통일문제는 당위성은 있었으나 청년세대의 특권인 상상력을 발휘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부족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통일담론 보다는 반공(反共)에 핵심 가치를 두었고 정부의 독점적 기획에 의해 움직였다. 사회적 이슈들이 독점적 형태로 공급될 때 담론의 수요자보다는 공급자의 의도와 목소리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수요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통일문제 역시 공급자와 수요자의 쌍방향 소통보다는 정부 중심의 독점체제를 유지해 왔었다.

사회 모든 부분에서 ‘반공’에 기초하지 않거나 혹은 다른 목소리를 내면 배타적인 취급을 받는 것을 넘어 명확한 원인 규명 없이 ‘친북 좌경’ 취급을 받기도 했다. 우리 사회는 ‘반공에 의한 통일’이 모든 여론을 독점했고 다른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사회는 그것을 너무나 당연시 하는 분위기였고 젊은세대들은 그것을 교육을 통해 신념화했다. 이렇듯 통일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상상력은 제한되고 있었다.


2) 청년 통일운동 세대론

사회 전반적으로 청년들의 통일에 대한 상상력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자하는 크고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먼저 젊은세대의 통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세대 구분에 관한 논의를 해보자. 세대를 구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인위적이고 주관적이다. 세대를 구분하는 기준도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에 대한 평가 또한 다르다. 현재 세대를 구분하는데 있어 가장 공감이 가는 구분이 바로 거대한 역사적 이벤트 전과 후다. 대표적인 것이 2차 대전이 이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다. 2차대전 이후의 경제적 풍요, 대중문화, 신좌파, 성 개방, 여성 해방, 인권/반전/반핵/환경 운동 같은 시민운동의 성장, 윤리적소비 등이 2차 대전 이후 베이붐 세대라는 용어속에 들어가 있는 속성들이다.

한국 사회도 다양한 기준에 의해 사회과학자, 언론 등이 세대를 규정한다. 새마을운동, 서울올림픽, IMF 외환위기, 대북포용정책, 인터넷 대중화 등 사건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 세대를 구분하기도 한다. 청년통일운동의 경우 명확한 아직 명확한 구분점은 없으나 청년들의 에너지가 분출 되었던 사건의 전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청년들의 에너지가 분출 되었던 대표적인 시점은 1960년 4월 민주혁명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있다. 4월 혁명과 6월 항쟁은 청년 대학생들이 시작해서 시민들이 참여한 대표적인 민주운동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운동이 ‘청년통일담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 되었다.


① 청년통일1세대 (1960년대~70년대)

1960년 4.19혁명은 한국의 청년들에게 민주주의의 기치를 들고 자유당의 독재에 맞서 승리했다는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4.19 이후 청년들은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게 된다. 1961년 5월 3일 서울대 민족통일연맹 (민통련)이 남북학생회담을 제의 하면서 학생들간의 대화 및 문화 교류에 대한 움직임이 처음 일어나게 되었으나 곧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성사 되지 못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부터 1961년 5.16 사이에는 기존의 ‘북진통일’과 다른 새로운 각도에서 분단을 해석하고 남북 교류와 통일을 조망해 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청년들 가운데 있었다.

1960년 10월 24살의 청년작가 최인훈은 잡지 <새벽>에 금기시 되어 왔던 분단을 처음 묘사하며 남북을 오가며 한 인간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선택을 사실감 있게 표현한 소설 ‘광장’을 발표했으며 1961년 31살의 젊은 언론인 조용수는 혁신계열의 생각을 담은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새로운 통일담론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5. 16 이후 사회전반에 ‘반공’이 강화 되면서 민간, 특히 젊은세대들의 통일담론은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한다. ‘반공통일’에 기반한 국가정책은 청년들과 어린 학생들의 생활 깊숙이까지 파고들었다. 초중고 각급학교에서는 매년 여름 6.25전쟁 기념일을 맞아 반공포스터, 글짓기, 웅변대회가 개최하며 반공의식을 함양하게 했으며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는 꼭 반공 유적지를 방문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는 교련 과목을 통해 남학생은 총검술과 같은 기초군사 훈련과 군가(軍歌)를 배웠고, 여학생들은 전시에 부상자들을 응급처치 할 수 있는 간호교육을 받았다. 각급학교에는 학생회 대신 나라를 지키는 학생들의 모임이란 의미의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이 조직 되어 학생회를 대체했다. 학교 뿐 아니라 학교 밖에서도 반공에 대한 메시지를 수시로 전달 받았다. 매주 주말 텔레비전 정규 방송에서는 ‘배달의 기수’라는 반공 프로그램이 똑같은 내용으로 모든 공중파 채널에 방영되었으며 ‘추적’, ‘113수사본부’, ‘전우’ 같은 반공 드라마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아래 제작되어 황금 시간대의 안방극장을 독차지했다.

병영화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학가는 일명 3M (마르크스, 마오쩌둥, 마르쿠제) 심취하기도 했고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며 새로운 사회에 대한 동경을 품었다. 하지만 이상은 있으나 구체적인 움직임과 성과를 내기에는 현실이 무게가 너무나 버겨웠다.


② 청년통일2세대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철옹성과 같은 ‘반공에 의한 통일’의 독점 현상은 198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성공을 거두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으로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다양한 요구들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물론 통일문제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3월 29일 서울대학 총학생회 선거유세과정에서 총학생회장 후보 김중기는 ‘남북학생판문점회담’을 북한 김일성대학 학생회측에 공개 제의했다. 남북학생회담은 당국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었지만, 이 제안은 4·19혁명 이후 처음으로 민간 주도로 통일문제를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청년들의 통일 담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체제 경쟁 상대였던 사회국가들이 무너지면서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해외여행이 완전 자유화 된 이후 한반도 그것도 휴전선 아래 지역에 섬처럼 갇혀 있었던 국민들의 생각과 사고의 지평(地坪)이 넓어졌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당시 유행했던 말처럼 대학생들은 방학이 되면 배낭을 메고 유럽과 미주 대륙, 아시아를 누비고 다녔고 이전 세대가 보고 듣지 못한 것들을 체험하고 돌아왔다.

자본주의로 체제 전환된 과거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직접 방문하기도 하고 통일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가서 역사의 유적이 되어 버린 베를린 장벽과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를 휴전선 철책과 판문점에 대비시켜가며 ‘우리나라는 언제쯤’하며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전반적인 변화가 가속화 되면서 대학가에서는 북한서적을 읽고 북한 영화를 보고 북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일명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리고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1989년. 민족 문제에 좀 더 적극적이었던 21살의 대학생 임수경은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북한에서 열린 사회주의권 청년들의 잔치인 ‘세계 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할 수 있었다. 임수경의 방북은 본인의 인생 뿐 아니라 남북한을 비롯한 한민족 전체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이점을 활용해 북한과 접촉하려 했다. 과거보다 자유로워진 환경은 남북한과 해외동포들이 연대하여 통일의 에너지를 크게 분출 시킬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늘어났다.


③ 지금은 청년통일3세대? (2000년대 이후)

청년층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통일담론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수년동안 정점에 이르게 된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등 사회문화 교류가 활성화 되면서 북한에 대한 열린 시각과 통일에 대한 기대감 또한 강했다. 1990년대 초반 학생들이 당국의 눈치를 봐가며 했던 통일 운동과는 또 다른 모습의 통일 논의가 전개 되었다.

남북의 청년들이 금강산 등지에서 공개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장이 열렸고 새로운 시도를 할수 있는 공간이 마련해 지는 듯 했다. 하지만 축제는 거기까지였다. 남북 교류의 다양한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한국 사회가 세계화를 추구하며 다양하고 다원화된 사회로 가면서 처음에 가졌던 열기는 식고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국경과 국적의 의미가 옅어지면서 한국 사회에서 북한이나 통일에 대한 의식은 과거와는 달리 점점 약해지고 있다. 또한 2008년 정권 교체이후 남북의 길이 막히고 사회 양극화와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청년들은 거대담론의 통일문제에서 더욱 관심이 멀어져 갔다. 더욱이 2010년에 발생한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을 거치며 북한이란 존재에 대해 혐오와 염증을 느끼는 청년들이 늘어났다.

이제 과거 남북학생회담 추진은 이미 역사 속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구국의 강철대오’를 외쳤던 ‘전국대학생 대표자협의회 (전대협)’과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 (한총련)’ 역시 추억 속의 단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대학가는 민족해방계열인 NL과 민중민주계열인 PD의 열띤 노선 투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문제나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는 학생들도 같은 핏줄인 북한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제3세계의 빈곤문제나 공정무역, 사회적기업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기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마을에 우물을 만들어 주고 어린학생들이 학업을 할 수 있도록 후원을 하고 남아메리카의 커피농부나 동남아시아의 사탕수수 농부들이 생산한 작물을 공정한 가격에 사는데 관심이 많다. 다문화 가정 자녀 문제, 길거리 노숙자 문제, 윤리적 투자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대안을 모색하는데 열정을 쏟는다.

한때 정치권력이나 학생운동에 의해 최대의 여론 독점을 누렸던 ‘통일문제’는 점점 잊혀지고,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들 마저 다른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돌리면서 통일의 당위성이나, 같은 핏줄인 북한을 돕는 일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과거와 달리 통일담론은 정부 주도의 ‘반공에 의한 통일’이라는 담론독점이 깨어져 나갔지만, 대신 세계화 과정에서 다양한 이슈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있다. 물론 아직 통일과 북한 문제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높은 것은 사실이나 과거처럼 독점을 누릴 만큼의 위치에 있지 않다. 통일 문제는 당위성 보다는 다양하고 다원화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주요 이슈 중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 갈수록 ‘꼭 통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렇지만은 않다’라고 대답하는 이가 늘어나고 있고 ‘독일-오스트리아는 같은 민족 이지만 두 개의 나라로 살고 있지 않은가?’라고 질문하는 이들도 있다. 반면에 통일에 대해서도 당위성을 넘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통일담론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고,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춘 통일담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