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계의 전설 장민호 선생님이 지난 11월 2일 타계하셨다. 향년 88세.
장민호 선생님은 1924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장민호는 1947년 조선배우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성극 ‘모세’에 출연하면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국립극장 전속극단 신협에 입단한 그는 이후 2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국립극단의 단원을 거쳐 국립극단 단장, 한국연극협회 이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60년 이상을 연극 무대를 위해 활동했다. 장민호 선생님과 여성연극인 백성희 선생님을 기념한 백성희장민호극장이 있을 만큼 그는 한국 현대 연극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런데 장 선생님의 부고 기사에 많은 적지 않은 언론들이 기사 헤드라인에....“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원빈 ‘노역(老役)’”으로 표기했다...물론 틀린말은 아니다... 주인공 원빈의 나이든 모습을 연기 했으니 말이다. 사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장민호 선생님은 영화를 열고...또 닫는 역할을 하셨다. 50년 동안 잃어버린 형을 기다리는 마음...그리고 형의 유골 앞에서 오열하던 그 모습...정말 눈시울을 적셨다.
강제규 감독이 고민했던 배역 캐스팅이 바로 장민호 선생님이었고.... 삼고초려의 과정을 거쳐 가까스로 섭외할 수 있었다....(태극기 휘날리며 제작 다큐멘타리에 나오는 내용임)
그런데 원빈 ‘노역(老役)’으로 표기한 장민호 선생님의 부고 기사는 웬지 씁쓸하기만 하다. 연극계 큰 별을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을까. 분명 그의 삶은 한국 문화사의 한 페이지였는데 말이다. 단지 본업이 아닌 영화의 배역으로 평가 받는 것이 아쉬었다.
그런데 어찌하랴...
대중은 그의 업적 보다는 누구나 한번쯤은 봤을 ‘태극기 휘날리며’의 그 장면의 그 배우를 더 먼저 기억하니 말이다. 아마도 부고 기사를 쓴 몇몇 기자들은 갈등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연극계에서 업적을 이룬 장민호 보다는 영화 속 그 장면의 장민호를 독자들이 더 잘 이해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기사를 썼을 것이다.
일반 독자들에게 어필 할 수 있는 것은
비주류의 special이 아니라...
주류 무대에서의 자극적인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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