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일한국

영화 <이중간첩>(2003) - 두 개의 조국, 두 개의 신분





‘베를린’ 그리고 ‘체크포인트 찰리’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범국가인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수도인 베를린도 자유진영의 서베를린과 공산진영의 동베를린으로 나뉘었다. 하지만 베를린 시민들이 도시 안에서 동과서의 경계선을 넘어 이동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961년 8월, 동독에 의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간의 경계선이 막히면서 이러한 자유는 갑작스레 끝나버린다. 처음에는 이 경계선에 철조망과 장애물로 엮은 바리케이드가 놓여 있었지만, 나중에 높은 콘크리트 벽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베를린장벽’이다.


동서 베를린 간의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장벽을 따라 검문소가 설치되었다. 미군이 관할 했던 프리드리히슈타트의 검문소(Check Point)는 '체크포인트 찰리(Check Point Charlie)'로 불렸다. 체크포인트 찰리의 동독측 검문소는 통행을 저지하는 막대와 지그재그로 놓인 콘크리트 장애물, 감시탑에 차량과 그 안에 탄 사람들이 수색을 받는 넓은 구역까지 있었다. 반면 서독측 검문소는 그저 나무로 된 단순한 부스만 있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허가를 받은 군대 인사들, 기자, 외교관, 고위 인사들이 지나다니는 곳이었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몇 차례의 대담한 탈출 시도가 벌어지는 장소로 명성을 얻었다. 그중 가장 악명 높았던 사건은 1962년 탈출을 실패한 페터 페히터 사건이다. 그는 총을 맞고 철조망 부근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채로 방치되어 죽었고, 이는 언론에 보도되며 독일분단의 현실과 아픔을 전 세계에 알렸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독일분단과 이데올로기 갈등의 상징성 때문인지 냉전 시대 스파이 소설이나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나름의 독특한 매력을 풍기기도 했다. 한국영화에도 이데올로기 갈등의 상징인 체크포인트 찰리를 배경으로 시작하는 영화가 한편이 있다. 바로 김현정 감독의 영화 <이중간첩>이다.



영화 <이중간첩>


영화 <이중간첩>은 남한이 아닌 북한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다소 생소한 설정에서 출발한다. 림병호(한석규)는 북의 신념과 체제에 충실한 인물인 동시에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1980년 동독 동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관에 근무하는 정보요원이지만, 체제에 불만을 느끼고 체크포인트 찰리를 통해 남한으로 귀순한다. 하지만 그에 숨겨진 정체는 북한의 지령을 받는 위장 간첩이다. 철저히 짜여진 탈출 각본에 의해 그는 숨가쁜 추격전을 벌이며 총상을 입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남한에 온 림병호는 ‘자유를 찾아 내려왔다’고 주장하지만 조사과정에서 살인적인 고문을 받는다. 가수 혜은이의 노래 <제3한강교>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며 진행되는 고문 장면은 1980년대의 군부독재의 상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들쑤시는 듯하다. 혹독한 고문이 과정을 거친 림병호는 2년간 북파공작원 훈련교관 업무를 맡게 되고 이후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안전기획부의 간부인 백승철(천호진)에 눈에 띄어 정보분석 요원으로 발탁된다. 


남한에 온 후 몇년간 매일 밤 윤수미(고소영)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던 림병호에게 마침내 기다리던 암호지령이 떨어진다. ‘콘탁트 데제’(디제이와 접선하라). 림병호는 고정간첩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수미를 통해 남한 내 고정 간첩의 총책인 암호명 청천강 송경식(송재호)의 지령을 받으며 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남쪽 안전기획부의 대북작전을 수포로 만들기도 한다. 당의 명령을 실행하고 싶어 늘 조바심을 내는 림병호에게 남한에서 나고 자란 고정간첩 윤수미는 포근함과 위안을 제공한다. 자신을 철저히 위장하고 24시간 감시받으며 살아가는 갑갑한 림병호의 삶에도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다.


이들 남녀 사이에는 두 명의 중재자 혹은 감시자가 등장한다. 북의 고정간첩 청천강 송경식과 안기부 간부 백승철이다. 두 사람은 북한과 남한이라는 적대적 체제의 이중적 모습을 드러낸다. 역설적이게도 이들 두 사람은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는 림병호와 윤수미의 만남을 주선한다. 백승철은 림병호의 건조한 삶에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주겠노라 말하고, 송경식은 북의 지령을 하달하기 위해 윤수미를 다리 삼아 림병호와 의사소통한다.


영화 속 갈등의 폭발은 고정간첩 송경식이 체포되면서 이뤄진다. 림병호는 안전기획부 고문실에서 얼굴을 몰랐던 송경식과 대면한다. 그리고 백승철은 림병호에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자백을 받아 낼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북한 당국은 그에게 송경식을 살해할 것을 명령한다. 림병호는 북의 지령을 따르려고 하지만 송경식을 아버지 처럼 생각하는 연인 윤수미의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림병호와 윤수미의 행각은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발각되기 시작하고 극의 긴장감은 한층 더해진다. 북한 역시 더 이상 이들이 쓸모가 없어지자 용도 폐기를 하려한다. 결국 이들은 남과 북 어느 사회에서도 편입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서울 주재 외신기자의 도움을 받아 브라질로의 도피를 선택한다. 그리고 2년 후 브라질의 외딴 길거리에서 림병호는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살인청부업자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이중간첩’하면 떠오르는 인물...이수근


영화 <이중간첩>은 제목은 참 직설적이다. 이중간첩은 ‘double agent’로 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체제 갈등이나 적대국가 사이에는 꼭 ‘이중간첩’이 존재했다. 실제 남북관계에서도 이중간첩 사건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67년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이다. 


이수근은 당시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북한 당국으로 부터 위장월남 귀순하라는 지령을 받고,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를 취재하다가 UN군에 귀순의사 피력한 뒤 극적으로 탈출하여 남한으로 왔다. 한국정부는 그가 북한의 언론계 거물이며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면서 주택과 정착금을 지급하고 결혼까지 주선하며 남한 생활 정착을 도왔다.


그러나 그는 남한의 각종 기밀을 수집하여 북한에 보내려는 시도를 했다. 그의 여러 가지 행동이 점차 수상해지자 한국정부의 정보 및 수사당국에서는 그를 주시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수근은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음을 눈치 채고 위조여권을 만들어 한국을 탈출, 홍콩·방콕을 거쳐 호찌민에서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하여 체포되어 한국에 압송되어 간첩죄를 적용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이것이 그동안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수근 위장간첩 사건’이다.


하지만 사건이 40여년 지난 2008년 12월 법원은 이수근을 간첩으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다. 간첩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물이었던 암호문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법원 판결에 앞서 2007년 1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이수근이 중앙정보부의 지나친 감시 및 재북 가족의 안위에 대한 염려 등으로 한국을 출국하자, 중앙정보부가가 당혹한 나머지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조작, 처형하여 귀순자의 생명권을 박탈한 비인도적·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분단과 이데올로기 갈등, 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한 사람과 그 주변 인물들의 삶이 처절히 짓밟힌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수근 사건 뿐 아니라 지식인, 조업 중 납북된 어부, 유학생 등을 대상으로 한 정보기관에 의한 조작된 간첩단 사건들이 있었다. 모두 시대의 희생양이고 아픔이었다. 물론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들도 있었지만 실제 간첩사건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어울림의 ‘광장’을 꿈꾸며


1960년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는 남과 북, 그 어느 쪽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해 중립국을 선택하는 인물 이명준이 등장한다. 제3국을 향하는 배에서 투신한 그의 죽음에서 작가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개인의 좌절을 그렸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리고 영화속에서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 들여야 했던 이명준과 같은 이들을 보아왔다. 


이중간첩 림병호 역시 영화제목이 말해 주듯 남과 북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혁명과업을 위해 몸에 총알이 박히는 아픔을 감내하고 살이 찢어지는 지독한 고문마저 이겨낸 그였지만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도피의 길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림병호는 비록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스파이였지만 그는 분단이라는 장애 속에서 한 여인을 품었던 로맨티스트였고, 정치적 음모 가운데 사람다움을 생각하고 표현한 휴머니스트였다.


영화 속 림병호가 동베를린을 탈출했던 장소인 ‘체크포인트 찰리’는 지난 1990년 독일이 통일 되면서 자연스레 그 역할을 다하고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경계를 구분짓던 장벽과 철조망도 감시하던 군인들도 이제는 없다. 다만 옛날의 일들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초소 모형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서 있는 군인 복장을 한 모델들만 있을 뿐이다. 이제 그곳은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이 되었다. 


시대는 우리에게 말한다. 더 이상 ‘위장’, ‘잠입’, ‘비밀’ 이런 단어들 보다 ‘광장’으로 대변 되는 ‘개방’, ‘공유’, ‘어울림’으로 가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