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이 엄격하던 과거 계급 사회에서는 같은 뜻이라도 백성과 임금이 사용하는 말이 달랐다. 임금이 신하의 청을 허락하는 것을 윤허(允許)라 하고 임금을 얼굴을 용안(龍顔)이라 하며 임금의 크고 거룩한 은혜를 성은(聖恩)이라 한다. 또한 임금이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을 몽진(蒙塵)이라 한다. 몽진(蒙塵)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티끌을 덮어 쓰다’란 뜻이다. 존귀한 임금의 몸으로 머리에 먼지를 덮어 쓰는 수고로움을 개의치 않고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이른다.
우리 역사를 보면 적지 않은 임금들의 국난을 피해 궁궐을 떠나 몽진의 길에 올랐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올라 오자 선조 임금은 신료들의 뜻을 받아 들여 도성인 한양을 떠날 것을 결정한다. 하지만 선조는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한양을 빠져 나가려 했다. 1592년 4월 30일 선조가 도성을 버리는 순간,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경복궁과 창경궁에 불을 질렀다. 이미 민심은 왕에게서 멀리멀리 떠나 있었다. 왕은 개성에서 백성들로부터 돌팔매질도 당했다. 평양에서는 중전이 타고 있는 말을 백성들이 때리기도 하였다.
평안도 숙천에서는 누군가 관아 담벽에 '국왕 일행이 강계로 가지 않고 의주로 간다'는 낙서를 해 놓았다. 선조 행방을 일본군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함경도에서는 귀양와 있던 하급관리가 임해군과 순화군 등 두 왕자를 사로잡아 일본군에 넘기기까지 하였다. 백성들은 그렇게 화가 나 있었다. 선조는 한양이 수복되고 일본군이 남하한 뒤에도, 의주에서 돌아가려하지 않았다. '성중지변(城中之變:백성들이 일으키는 변란)'을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비단 임진왜란 때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이 압록강을 건넌지 14일 만에 한양이 함락되어 인조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가 삼전도에서 적장에 항복하는 치욕을 당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은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본인은 이미 피난을 떠났으면서도 서울 시민들에게 서울은 안전하고 곧 국군이 북한 공산군을 물리칠 터이니 서울을 떠나지 말라는 라디오 방송을 했다. 이를 믿고 서울을 떠나지 않았던 상당수의 시민들의 북한 공산군 치하에서 수모를 당하며 고생을 하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거나 납북이 되기도 했다.
리더가 말이나 행동에서 신뢰를 잃으면 더 이상 팔로워들은 그 리더를 존중하지 않는다. 더욱이 억압된 신분제 사회에서 그 반발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물리적인 행동으로 표출 되기도 한다. 선조 임금의 은밀한 몽진은 백성의 동요을 막으며 도성을 탈출하는 작전의 수행이었는지는 모르나 백성들의 마음을 떠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어 버렸다. 만약에 선조임금이 백성들에게 나라가 처한 상황을 솔직히 말하고 도성을 당분간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어땠을까? 아마도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는 바닥까지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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