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5일, 부활절. 미국 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Underwood) 선교사와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선교사가 한국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아펜젤러는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면서 이런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죽음을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묶고 있는 모든 속박을 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으로 인도해 주옵소서.”
이들이 한국 개신교의 공식적인 출발점이다. 당시 아펜젤러는 27세, 언더우드는 26세였다. 두 사람은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학교와 병원을 세우며 한국의 근대화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수교한 이후, 조선 정부의 공식 허락을 받고 입국한 첫 목회자였다.
하지만 이들보다 먼저 조선 땅에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신앙인들이 있었다. 토머스 목사(Robert J. Thomas)는 영국 출신으로, 대동강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 또 한 사람,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는 중국에서 활동하며 조선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한 인물이었다.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로, 1872년부터 중국 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중국에서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고,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로스는 만주의 통화현이라는 지역에서 조선인들을 만나 한국어를 익히고, 복음을 전했다.
그는 1879년, 조선인 4명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함께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1883년에는 <사도행전>, 1884년에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번역해 출판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조선에 들어오기 3년 전 이야기다.
그리고 1887년, 마침내 한국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인 《예수셩교젼서》가 완성되었다. 이 성경은 일본을 거쳐 부산 동래, 원산, 대구 등지에 퍼졌고, 북쪽 압록강 근처의 조선인 마을에서도 읽혔다. 1885년까지 이 성경을 통해 100명 이상이 세례를 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서울까지 성경을 전파했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오기 전부터 이미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100명 이상 생겼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선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들은 서양식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우며 교육과 복지의 문을 열었다. 대표적으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와 새문안교회를 설립했다. 이 학교와 교회는 한국 근대화를 이끈 중심이 되었다.
많은 지식인과 젊은이들이 이 학교와 교회에 몰려들었고, 기독교 신앙과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선교의 영향은 여기서 크게 나타났다. 배재학당에는 양반 자제들이 다녔고, 그들은 종을 데리고 학교에 왔다. 아펜젤러는 "진짜 교육은 종을 데리고 오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지적했다.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일자리를 소개해 주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모습은 조선 사회에 큰 감동과 변화를 주었다.
또한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은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무료로 치료를 해주었다. 당시 병원은 단순한 의료시설을 넘어서, 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랑의 공간이었다.
나라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지만, 교회는 오히려 성장했고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교회에서 자라나 한국 사회와 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우리는 이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부른 찬양과 시를 통해 그들의 고민과 고백을 함께 느껴보려 한다. 일제강점기, 분단, 전쟁, 갈등, 민주화, 그리고 통일의 꿈까지—그 모든 과정을 지나온 선배들의 신앙을 되새기려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고백한 그 말처럼.
“내게, 그리고 우리에게 강 같은 평화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