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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에 없던 혁명, 베를린 장벽 붕괴

 

1989년 5월, 동독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에서는 평화 기도회가 열렸다. 기도회를 마친 수십 명의 시민들은 인근 아우구스투스 광장으로 향해 공산주의 체제에 항의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교회를 봉쇄하고 일부 시민들을 연행했지만, 시위는 매주 월요일 계속되었고 참가자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 월요 시위는 유혈사태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되었고,

 

니콜라이 교회는 이미 1980년대 초부터 인권과 평화를 위한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변화의 조짐은 1989년 5월 7일 동독 지방선거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동독 정부는 여느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선거를 치르고 99% 이상 찬성률을 발표했지만, 시민들은 이 결과가 조작된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항의 시위는 곧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1989년 한 해에만 100회가 넘는 시위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시위가 시간이 지날수록 여행의 자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확대되었다. 특히 11월 6일 시위에서는 자유선거 실시와 함께 베를린 장벽 철거 요구까지 등장하며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었다. 마치 성경 속 여리고 성벽이 무너지듯, 베를린 장벽도 종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전환점이 된 1989년 11월 9일. 동독 공산당 정치국원이었던 귄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는 국내외 기자들을 상대로 브리핑을 진행했다. 당시 동독 지도자였던 에곤 크렌츠(Egon Krenz)는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달래기 위해 여행 제한 완화 조치를 담은 정책을 준비 중이었다. 이는 곧바로 국경 개방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고, 절차에 따라 여권과 비자를 신청하면 더 쉽게 승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브리핑 직전까지 휴가 중이던 샤보브스키는 정책의 구체적 시행 시점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상태였다. 기자회견 도중 한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행되느냐”고 묻자, 샤보브스키는 준비되지 않은 채 “즉시, 지체 없이(sofort, unverzüglich)”라고 답했다. 이 발언은 전 세계 뉴스에 속보로 전해졌고, 동베를린 시민들은 즉각 체크포인트 찰리 등 국경검문소로 몰려갔다.

 

당황한 국경 수비대는 상부와 연락을 시도했지만 명확한 지시를 받지 못했다. 결국, 베를린 중심부의 본홀머 거리(Bornholmer Straße) 검문소에 있던 중령 해럴드 예거(Harald Jäger)가 자의적으로 국경을 개방하게 되었다. 밤 11시 30분, 그는 더 이상의 혼란과 충돌을 막기 위해 문을 열었고, 수천 명의 동독 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넘나들며 장벽 위를 걷는 역사적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28년 만에 붕괴되었고, 독일 통일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