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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이야기/코즈(공익) 마케팅

선경그룹 (현재 SK)의 장학퀴즈 - SINCE 1973





경쾌한 리듬의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은 1970년대 MBC ‘장학퀴즈’ 시그널 음악으로 명성을 날렸다. 당시 전국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장학퀴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화 아이콘이었다. “전국 고등학생들의 건전한 지혜의 대결, 장학퀴즈” 차인태(현 경기대 교수) 아나운서의 오프닝 멘트와 함께 전국은 TV 삼매경속으로 빠져들었고 TV 수상기 보급대수가 60만대를 겨우 넘어서던 시절에도 장학퀴즈 녹화가 있는 날이면 MBC 공개홀이 있었던 서울 정동 주변에는 수천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선경그룹이 장학퀴즈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3년 2월이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아 그럭저럭 1년여를 끌어왔지만, 광고가 좀처럼 붙지 않았던 탓에 프로그램은 존폐의 기로에 서있었다. 소식을 접한 선경그룹은 과감하게 장학퀴즈의 단독 광고주로 나서겠다고 제안했다. 선경은 당시 50대 기업에 겨우 꼽히는 중견기업이었지만, “열 사람중 한 사람만 봐도 청소년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라면 조건없이 지원해도 괜찮다”는 것이 최종현(전 SK그룹회장)의 판단이었다. 단일 광고주가 프로그램 제작비용 일체를 지원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일어었다.

1974년 7월 최종현은 프로그램의 순수성을 위해 방송 앞뒤에 붙는 제품 광고를 없애고 공익 광고를 제작해 방송하도록 조치했다. 당시로서는 처음 시도된 공익 광고였다. 짭짤한 광고 효과를 거두고 있던 스마트 학생복마저 광고를 중단하라는 지시에 임원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선경그룹이 교육부라도 되느냐”는 노골적인 불평도 터져 나왔다. 하지만 최종현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최종현 회장의 장학퀴즈에 대한 애착은 각별했다. 최종현 회장은 선경그룹 임원들과 장학퀴즈 제작진과 식사를 함께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동안 장학퀴즈에 투자한 돈이 모두 얼마냐”고 물었다. 임원들은 “150억~160억원 가량 된다”고 답했다. 이에 최종현은 “그럼 선경이 장학퀴즈로 번 돈이 얼마쯤 되느냐”고 물었다. 임원들이 우물쭈물하자 최종현은 “7조원쯤 된다”는 답을 내놓았다. 기업 홍보 효과가 1조~2조원쯤 되고 나머지는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서 교육시킨 효과라는 설명이었다.

장학퀴즈는 1996년 MBC에서 교육방송 EBS로 무대를 옮겨 지금까지 계속 방송이 되고 있다. 그동안 출연자수는 1만명을 넘어섰고, 의사, 법조인, 언론인, 교육자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수도없이 배출했다. 1975년 출전했던 송승환은 세계적인 문화 수출상품 ‘난타’의 공연기획자가 됐고, 같은해 출전한 이규형은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다. 1976년 주 차석을 차지한 후 “체육학과에 진학해 권투선수가 되고싶다”는 포부를 밝혔던 김두관은 2003년 행자부 장관에 임명됐다. 1986년 출전했던 한수진은 SBS의 뉴스 앵커가 됐다.


사업보국과 압축성장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장학퀴즈를 후원을 통한 선경의 공익사업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1970년대는 개발과 성장을 모토로 경제발전 하나만을 생각하던 시절이라 오늘날과 같은 사회공헌,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같은 기업의 역할에 대해서는 논의 자체가 전무했다. 경제전문가들은 우리가 이루어 낸 고도의 경제성장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비평을 하고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의 경제 개발정책이 한국 경제가 세계 10위권의 도약하는데 있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경제 개발시대 기업 역할은 단지 최대의 경제적 수익만 올리고 일자리를 많은 만들면 그것으로 족했다. 저개발 국가인 한국에서 기업의 공익적 활동 이야기 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지 못했고 대다수의 국민들도 분배나 복지의 문제 보다는 잘살아 보자는 사회 분위기에 맞물려 자신의 희생을 통해 좀더 낳은 경제적인 생활을 꿈꿨다.

기업은 일반적으로 '인적ㆍ물적 자원을 결합해 재화나 용역을 생산ㆍ판매, 이익을 창출하면서 그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조직'으로 정의된다.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공급하고 고용을 확대해 국민 후생에 기여하면 기업은 할 일을 다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동안 한국 기업이 했던 사회봉사 활동은 연말연시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해 생필품을 전달해 주고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해 주는 것이 주류였다. 장학퀴즈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선경의 예는 당시로서는 혁신에 가까운 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