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 사회주의 혁명, 1차 세계대전, 경제대공황 등을 겪으며 부침을 거듭하던 세계경제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역사에 없던 최대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1953년에서 1960년까지 세계의 공업 생산력은 31%정도 증가하고 나일론, 폴리에스테르와 같은 인공화학물, 텔레비전, 라디오, 냉장고와 같은 가전제품이 등장했다. 또한 자동차, 철도, 비행기 등 과거에 대중화되지 못했던 교통수단도 생활 속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급속도로 이루어진 경제의 번영은 과거 경제의 한 주체로만 생각했던 소비자에 대한 생각을 바꿔 버렸다.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소비자 보다는 제품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사람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부족하니 소비자들의 목소리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기술개발과 대량생산으로 공급이 확대되고 소비자의 선택에 따라 회사의 흥망이 결정 되었다.
소비자의 힘은 일종의 권력이 되었다. 소비자들의 마음을 읽고 소비자의 만족을 연구하는 학문도 생겨났다. 마케팅(Marketing)분야도 바로 1950년대 이후 소비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소비자의 권익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랄프 네이더(Ralph Nader)다. 민권운동, 여성운동, 인권운동으로 시민의식이 한층 높아지던 1965년 제너럴 모터스(GM)의 코베어 승용차가 설계 잘못으로 제동 장치에 심각한 결함을 안고 있으며, 심할 경우 주행 중에 폭발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긴 책 한 권이 미국 전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문제의 책 『어떤 속도로의 위험(Unsafe at any speed)』의 저자는 하버드 법대를 갓 졸업한 31세의 청년 변호사 랄프 네이더였다. 그는 코베어 승용차가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의사의 진단이 첨부된 피해자의 사진을 공개했다
이에 대한 GM의 초기 반응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였다. 하지만 네이더를 비롯한 소비자 운동가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결국 GM은 의회 청문회에서 자동차 결함을 인정하고 네이더에게 공개 사과를 하는 망신을 당했다. 이 일로 인해 불량부품이나 결함이 발견되면 자동차 회사가 안전한 새 부품으로 바꿔주는 리콜(recall)제를 골자로 하는 법안이 제정되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GM은 1970년 이사회에서 공공성을 대표하는 이사와 사회책임 위원회를 출범 시켰다.
이 일로 힘을 얻은 네이더는 시민단체 ‘퍼블릭 시티즌’(Public Citizen)을 창립하며 기업과 소비자의 문제를 열심히 파헤쳤다. 그는 자동차 안전문제를 비롯해 비위생적인 육류 포장, 방사선의 위험 등에 대한 치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관계 법률의 개폐를 주도했다. 70년대 들어서는 네이더식 운동에 동참하는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한 해에 수 만명씩 몰려 '네이더 특공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들이 우리 생활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안전벨트, 에어백 등의 자동차 안전을 위한 각종 장비 개발, 법규 마련은 이들로 인해 시작되었다. 대기업이 소비자 상담·모니터 제도를 적극 마련한 것이나, 납성분이 들어간 휘발유를 쓰지 않게 된 것 등 많은 역할을 했다.
레이더는 이후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1992년 이래 녹색당 후보로 미국 대선에 출마하고 있으나 시민운동 활동 때 만큼의 호응은 얻지 못하고 있다. 특히 2000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성향의 표를 잠식해 공화당 부시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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