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한국

귀순용사에서 탈북자로

유니브랜딩 2011. 12. 22. 23:24

  

#1

1983년 2월 25일 오전 11시경 수도권 일원에 갑자기 대공 사이렌이 울렸다. “여기는 민방위 본부입니다.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하며 방송이 흘러 나왔다. 혹시 “북(北)에서 또 다시 전쟁을..” 하며 긴장하던 시민들은 그날 뉴스 속보를 통해 젊은 북한군 공군대위 이웅평(2002년 사망)이 직접 북한군 주력전투기인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 했다는 소식에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를 귀순용사로 불렀고 이웅평 대위는 일약 스타 아닌 스타가 되었다. 어디 가나 사람들은 그를 환영 했으며 지금도 기성 세대의 뇌리속에 그는 귀순용사의 대명사로 자리잡고 있다.




  

#2

1987년 1월 14일 북한 청진시의 삼엄한 경비방을 피해 떨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며 배에 오르는 열한명의 민간인이 있었다. 68세의 노인에서부터 열한살 고등중학교 1학년(남한의 초등학교 5학년) 학생까지. 바로 선박에 의한 가족 탈북으로 유명한 김만철씨 일가의 탈북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이들은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기 위해 길을 떠났고 일본과 대만을 거쳐 남한에 왔다. 남한에 도착 했을 때 이들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영웅이 따로 없었다. 김만철 일가에게는 살기 위한 투쟁 이었지만 남한 사회에서는 체제의 우월성을 홍보 할 수 있는 한편의 귀순드라마였다.




  

#3

더 이상 사람들은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귀순용사로 부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들을 탈북자로 부른다. 그동안 전세계 사회주의국가들은 하나 둘씩 지도에서 사라져 갔으며 북한도 고질적인 식량란, 에너지난, 외화난, 생필품난으로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기 위해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그들중 상당수가 기대를 않고 남한에 왔다. 하지만 남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예전과 같은 주의 깊은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사선(死線)을 넘어 남한에 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같은 민족 이면서 너무나도 어색한 문화와 구조적인 빈곤의 삶이었다. 2007년 현재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새터민)은 1만명이 넘는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 이곳에서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정부기관, 교회, 사회복지단체, NGO, 교육기관 등에서 이들을 돕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진정으로 그들을 우리 삶의 일부로 품기에는 가야 할 길이 멀다.